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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전문직도 다 무너진다

AI가 바꾸는 삶

by 홍그리

AI는 소리 없이 무섭게 우리 삶에 스며든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영어회화 앱을 켠다. 하루의 첫인사를 영어로 하면서 AI의 답변을 듣는다. 답변을 함과 동시에 내가 말했던 문장의 오류나, 더 적합한 표현까지 동시에 집어준다. 조금 내가 지루해할 것 같으면 알아서 토픽도 바꿔준다.

극단적인 예시로는 AI여자친구도 만드는 세상. 얼마 전, 일본에서는 AI와 결혼하는 결혼식 영상이 큰 화제가 됐다. 오타쿠가 그렇게 많다는 일본이라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이만큼 AI가 우리 삶에 밀접하게 들어온 지는 사실 3년도 채 되지 않은 격이다. 무서운 속도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지인이 얼마 전 자소서를 잘 썼는지 좀 봐달란다. 지인은 현재 취업준비 중이다. 회사 이름을 말하면서

“00한 느낌이 나도록 자소서 큰 꼭지를 정해달라 “

하면 개요를 알아서 짜준다. 그 개요에 맞게 한 시간 동안 살만 붙여서 자소서를 써서 내더니, 오늘 면접에 간다고 연락이 왔다. 모두 AI가 우리 삶을 도와주고 있다. 이런 예시는 수도 없이 많다. 저녁으로 닭볶음탕을 요리하는 법이라던가, 저출산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는지 심층적인 사회이슈라던가, 무엇이든 답해준다. 웬만한 경제 교수보다 답변이 논리 정연하다.

즉, AI는 삶을 더 편리하도록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이 낳은 현대사회 최후의 결과물이다.


아래를 보자. 더 무서운 건 이거다.

미래에는 한국의 사회계층 피라미드 구조는 이렇게 네 갈래로 짜인다. 1계급은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기업인. 연예인이나 스타 혹은 유명운동선수나, 정치인이 2계급. 하류층 즉, 프레카리아트 계급은 전문직을 포함한 매일 아침 출근길에 힘들어하는 2,000만 명의 국민들이다. 회계사, 법무사, 세무사, 변호사, 검사, 판사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만 이룰 수 있는 이 전문직업조차도 AI에게 모조리 대체된다. 오히려 판검사나 변호사는 개인의 사적인 판단이 개입되지 않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더 객관적이라는 시각도 있을 정도다. 전문직도 이러한데, 일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은 오죽할까? 굳이 AI가 대체하기 전에 모두 자동화될 것이다. 하루빨리 우리가 하류 노동계층이 아닌, AI에게 대체되지 않을 1계급 혹은 2계급으로 올라서야 하는 이유다. 인간이 만든 AI보다 못한 인생이라니. 얼마나 비참한가.


이 두 계층은 공통점이 뚜렷하다. AI가 평생 넘볼 수 없는 것. 바로 인간의 감정과 취향의 영역이다. 누군가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축구선수가 되고, 음악을 좋아해 그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감정의 선이 있기에 아티스트가 된다. AI는 원론적인 정답만 말할 줄 알지, 아무도 생각해내지 않은 참신한 가사를 쓴다던가, 대중들에게 마음의 울림을 줄 수 있는 비트나 멜로디를 만들던가 하지 못한다. 만약 시킨다 해도 이미 나와있는 것들에서 짜깁기하는 정도겠지.

플랫폼을 소유한 기업인도 마찬가지.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대박을 치고 있는 당근이나, 이미 대기업에 반열에 올라선 컬리, 쿠팡 등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모두 인간의 고유한 감정의 영역을 건드린 것이다. ‘조금 더 안전하게, 가까운 곳에서 거래를 하고 싶은데 또 익명성까지 있으면 좋겠다’라는 인간의 취향과 감정의 영역을 건드려 플랫폼을 개발한 것이다. 컬리도 ‘새벽에 건강한 유기농 음식을 먹고 싶다’는 인간의 취향을 건드렸기 때문에 대박을 친 것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 지금 한창 선거유세 기간이니, 보면 다 보이지 않나.

상대에게 믿음을 주면서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 감정과 취향의 영역을 건드릴 수 있는 신뢰감.

결국, 미래의 1계급과 2계급에 AI가 접근하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이건 일상 속 AI에게 직접 겪은 내 경험담에 따른 고찰이다. 아래를 보자.


1. 해외에서 친구와 여행을 하다 친구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내 폰으로 물어본다. 친구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어떡해?

이렇게 답한다. 지금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 서류를 작성하고, CCTV가 있는지 확인하고, 현재의 여행국가에서 임시로 핸드폰을 구매할 하는 장소, 좀 더 간다면 얼마나 이 국가에 더 있을 건지 물어보는 딱 이 정도.

근데 친구가 만약 이 국가에 핸드폰 없이도 나와 즐거운 추억을 보내고 싶다는 확고한 주장과 감정선이 존재한다면? 굳이 이 말을 다 들을 필요가 있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핸드폰은 잃어버렸지만 더 많은 추억을 남긴 본인의 선택에 더 흐뭇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 결과도 그랬고.


2.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2주 안에 5킬로그램을 빼는 걸 목표로 삼았다. 챗GPT에게 물어본다. 이렇게 대답한다.

"야식을 먹지 말고, 아침에 공복 유산소를 하며, 당을 끊고, 채소위주로 규칙적인 식사를 하며 술은 절대 금지해라. 또 음식을 사거나 요리할 때에는 칼로리를 꼭 확인하면 도움이 되고, 하루 성인 평균 2000kcal를 넘지 않도록 해라"

맞는 말이다. 정석을 얘기했다. 근데 내 체중엔 2,000kcal를 먹는 극단적인 다이어트로는 3일도 못 간다.

나 스스로가 더 잘 안다. 그전에 아마 쓰러질 것이다.

자, 그러면 본인은 적당히 잘 규칙적으로 잘 먹으면서 걷기 운동을 한다던지, 본인에 맞는 다른 방법을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 효과측면에서도 후자가 압도적일 것이다. AI는 이 영역을 절대 침범하지 못한다.


3. 지금 돈을 버는 주식투자 방법을 알려줘. 지금 가장 유망한 기업은 무엇이고, 그 기업의 재무 건전성은 어떤지 말해줘.

"나는 테슬라를 추천해. 재무건전성이 우수하고~ 00면에서 아주 유망하고•••“

실제로 이 말이 옳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 사지 않은 나를 탓할 수 있다. 논리적 근거에 분석해 나온 결론이기에. 근데 투자라는 건 본인의 자산과 투자방식에 맞게 해야만 한다. 본인이 단기수익률에 집중하는 투자자가 아니라면 사실 이 대답엔 굉장히 회의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부동산, 재테크, 미래에 큰 결정을 해야만 하는 선택 모두 이에 해당한다.

본인의 전체 80세, 90세까지의 생애주기를 분석해 적절히 자산을 분배하고, 집을 사던가, 얼마는 주식투자를 하던가, 얼마는 현금으로 비상금을 모아두던가 해야 하는 본인의 계획과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그 직감과 취향은 대개 AI보다 훨씬 우수하다. 왜? AI는 본인을 모르거든. 본인의 인생은 어쨌거나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이건 일상 속 예시고, 사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건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내게 필요한 사람, 즉 관계다. 사람은 혼자살 수 없고 서로 연대할 때에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사랑받기 위해서, 그리고 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영역을 건드려야만 한다. 꼭 대단한 것일 필요도 없다. 하물며 따뜻한 말 한마디라던가, 마음의 선물이라던가, 적극적인 공감이라던가. 사람은 그런 데서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 마련이다. AI가 말하는 정답은 인간도 조금만 생각한다면 사실 다 할 수 있는 원론적인 말들 뿐이다. 즉, 인간 냄새라고는 없는 '정보'일 뿐. 감정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정답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안간관계에서의 정답은 보통 뭐 뻔하지. AI는 말한다.


“직장에서 복종하고, 부모님 존경하고, 친구와 오해가 생겼을 때에는 빨리 풀고, 늘 배려하고, 돈에 인색하지 않고, 생산적인 미래얘기를 하고•••“


그걸 모르나 우리가? 정답을 알지만 늘 관계에서의 변수는 존재하고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나듯 나 혼자만 바뀐다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식이다. 내가 지금 하는 글 쓰는 것도 똑같다. 오늘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직접 글을 쓰는 것과 AI에게 물어보는 것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의 폭 자체가 다르다. AI로 쓴 글과, 사람이 쓴 글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초등학생도 10초 만에 맞출 수 있다. 각자의 경험과, 감정, 취향에 따른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전제는 무조건 더 양질이고 이길 수밖에 없다. 어떤 이가 똑같은 정보성 글을 썼다 하더라도 동일하다. 당연히 사람이 쓴 글이 더 나은 판단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

살다가 생기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에도 풍부한 생각과 꼬리를 무는 어느 창의적인(예민한) 사람은 AI가 내놓는 정답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것도 감정의 영역이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이 결국 아티스트가 되는 것. 일전에 말했던 2계급이다.


세상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다. 생각하고 표현하고 그 아이디어를 세상과 접목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이제는 도래했다. 우린 AI가 못하는 걸 할 수 있다. 이유에 이유를 묻는 즉, 왜라는 질문에 답해볼 수 있는 나만의 가치 판단. 그래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다.

AI는 죽을 때까지 똑같은 말만 돌려쓰다가 고장 난다. 화려한 AI의 뒤편엔 획일화가 자리하거든. 그래서 편리함만 AI가 맡고, 그 외적인 부분에서 우리가 힘을 써야 한다. 그러면서 인간 개개인이 가진 탁월한 기질, 감정과 취향, 생각은 더 빛나기 마련이거든.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결국 이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 즉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태도로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게 이 시대의 키포인트지 않나 싶다. 단순히 현재 연봉 높은 직업군이 아니라.

나만의 언어를 쓰면서 어떤 원하는 것을 얻고 행동을 취할 것인지는 결국 감정의 영역. 한 사람이 사람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감정의 근육에서 나온다. 기술발전, 편리함, 다 좋단 다만 급히 세상 트렌드를 따라가다가 나를 놓치지 않는 최소한의 강박은 꼭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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