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비워야 할 때가 왔다. 쌓일 대로 쌓여버린 스트레스를 푸는 목적도 있거니와 여행이 내 삶에 어떤 리프레쉬를 주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근 대신 거제도행 열차에 새벽 여섯 시, 몸을 싣는다. 타이밍이 참 잘 맞았다. 한 친구의 소방공무원 시험이 끝났고 마침 호텔에 다니는 또 다른 친구와 내 회사복지의 콜라보로 거제로 연박을 할 수 있었다. 장소는 <소노캄 거제>.
고향이 거제도인 형에게 꼭 가야 할 할 맛집을 물으니 내장국밥을 꼭 먹어야 한단다. 늘 그렇듯 로컬맛집은 찾기 힘든 허름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국밥도 그랬다. 국밥을 평소에 정말 많이 먹고 좋아하는 나지만, 깻잎향이 나는 이 국밥은 참 담백했고,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거제도, 충남식당의 내장국밥
여기에 땡초를 넣고 밥을 추가하면 하루에 아무것도 안 먹고 이 국밥 한 그릇만 먹어도 몸이 든든하고 허기지지 않다. 속이 편안해지는 음식이다.
무엇보다 가장 고마웠던 점은 주인아주머니께서 브레이크타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음식을 내어주셨다는 점이다. 서울, 울산에서 여길 왔다고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큰 배낭을 메고 온 모습을 보시고는 그냥 들어오라고 하셨다. 이것이 경상도만의 정이다. 늘 무심한 듯 이렇게 챙긴다. 더 좋았던 점은 우리가 여행객인 것을 알고 주변에 식사를 하고 계신 분들이 맛집, 유명한 곳 등을 추천해 주시고, 사진까지 보여주시며 열정적으로 도와주셨다는 것이다. 여행하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생각할 때 비로소 그 도시의 이미지가 정해짐을 뒤늦게 생각해 냈다. 어쩌면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예의와 무례함의 그 사이 무언가를 늘 생각한다. 서울에 살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고 겪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보기 좋은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안주며 늘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다. 대중교통에서는 항상 조용히, 상대방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길을 물을 때도 늘 조심스럽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로 시작하는 말들은 설령 몰라도 더 알려주고 싶게 한다. 상대방이 가진 예의와 educated 한 행동, 통념들로부터 와닿는 에너지를 느낀다. 하지만 간혹 어르신들의 갑자기 훅 들어오는 무례한 말투나 부끄럼 없는 행동, 나이가 많으니 당연 대접받아야 한다는논리로 치부하는 행동들은 보기 참 불편하고 낯부끄럽다. 나이는 노력으로 먹는 것이 절대 아니며, 나이를 먹을수록 그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사회에서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전 세계 수도가 그렇듯 서울은 늘 바쁘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서울인구의 고작 50%도 안된다고 한다. 나머지 50%는 다 일자리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것이다. 이렇게 다들 일에 치여 산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에너지를 써가며 불필요하고 과한 예의를 갖추며 살 필요는 없지만 능력, 경제적 차이,배경, 나이를 배경 삼아 무례함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늘 인상이 찌푸려진다. 경상도의 정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정이 없는 각자 바쁜 이 서울에서 적어도 예의와 무례함 그 사이에서의 균형을 찾는 연습이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공간의 변화는 늘 삶의 활력을 준다. 여행이 가진 또 다른 매력이다. 여행이 의미 있는 이유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 내 색다른 공간에서의 오랜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현재를 추억하고 삶의 또 다른 동력을 불어넣는다.
오션뷰 고층 고급 빌라에 사는 연예인들이 나는 부럽지 않다. 오션뷰도 다 하루 이틀이지, 일 년 내내 오션뷰만 보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제한된 시간 내 즐길 수 있는 이 풍경과 사람이기에 더 아름답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호텔 직원인 친구 덕분에 호텔 조식, 사우나 부대시설들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이틀 동안 누렸다. 사우나 노천탕에서 서로 때를 밀어주고 하늘을 보며 나눴던 이 대화는 미래에 곧 우리의 자산, 추억이고 행복의 근원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행을 오면 또 한편으로 느끼는 것은 여행이 새로운 시작과 결정을 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공간이 바뀌니 내가 생각하는 인사이트도 바뀐다. 늘 익숙한 것만 원하는 뇌에서 받아들이는 인풋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유레카! 를 외친 아르키메데스도 목욕탕에 가서야 황금의 밀도를 계산하는 법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내가 쿠바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와 하바나 해변에서 함께 석양을 보고 있었는데 친구가 돌연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번 여행을 하며 미래에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도중 이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친구는 시험에 3번이나 도전했다.
쿠바 이튿째 나는 우연히 여행하다 한국인 형을 한 명 만났다. 밤에 술을 한잔 하다 사촌형도 여기 사실 같이 와있단다. 작가란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 아마 알지도 모른다며 누구냐고 물었다. 안유명하다고 절대 모를 거라고 하며 그 형은 이병률이라고 말했다. 나는 실제로 그 여행에 이병률 작가의 책 <끌림>을 들고 왔었다. 그만큼 좋아하는 작가였다. 밤새 그 형에게 이병률 작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그때 나도 처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여행을 하며 소방공무원 결과를 기다리는 내 친구는 노천탕에서 문득 바리스타자격증을 공부해 보겠다고 한다. 얼마 전 치른 소방시험은 매기지는 않았지만 아쉽게도 본인 예상에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고 평소에 커피를 워낙 좋아한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도하는 용기 자체에 큰 응원을 보냈다.
이처럼 20대, 30대에는 못 할 것이 없다. 젊음이라는 가장 큰 무기가 있거니와 세상에 길은 너무 많고 돈 벌 수 있는 수단은 과거 20~30년 대비 훨씬 더 다양하다. 오히려 이게 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여행은 갈팡질팡하고 방황하는 내 자신이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새로운 인생을 결정을 하는 데 있어 용기를 불어넣는다. 안 되면 어떤가? 그럼 말고. "안되면 말고"와 같은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스트레스가 반 이상은 줄어든다고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린다고 나는 확신한다.
여행을 하며 친구는 이런 말을 한다. 20대와 30대의 여행이 다른 것 같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말이 절대 지금 여행이 재미없고 의미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호텔에 묵고 있다. 물론 친구가 호텔의 직원이고 , 내 회사복지로 연박을 공짜로 묵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20대보다 다른 여행을 하고 있다. 숙소에 더 많은 경제적&시간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20대 때는 남들이 추천하는 관광지는 한 시간이 걸려도 꼭 가야만 했다. SNS에 유명한 맛집이 있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줄을 서서라도 꼭 먹어야 했다. 인증샷도 꼭 남겨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했다. 그게 여행의 묘미였고 자기만족이었다. 도장 깨기를 하는 것만이 곧 추억이고, 여행이 주는 의미라고만 생각했다. 도장 깨기를 마치고 늦은 저녁 숙소에 들어오기에 숙소는 그야말로 잠만 자는 곳이다. 그래사 숙소에 큰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어 늘 게스트하우스나 모텔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많이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숙소 안에서 사우나를 하고, 가까운 호텔 앞 해안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히려 숙소 안에서 서로의 인생을 듣고 늘 최선의 방안을 공유한다.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아침에 일어나 높은 전망에서 보는 바다에서 더 큰 인사이트를 얻고 삶의 위로를 얻는다. 굳이 저 바다에서 20대처럼 수영하고 놀지 않아도 이것이 더 의미 있는 일임을안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간다는 슬픈 현실일 수 있다. 하지만 20대 그때의 여행은 그 나름대로 추억이 있고 그 추억을 간직한 채 지금의 30대를 현명하게 만들어가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여행처럼 지금의 내 모습도 20대보다 더 성숙하고 연륜이 드러나는 것만 같다. 20대의 재기 발랄하고 관광지를 누비던 모습보다 여유 있고 성숙해진 지금 내 모습이 더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