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행복의 관계
인간이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 언어로 각자의 세계의 복잡성에 맞는 정보를 서로 공유하면서 연대하고, 사리분별하고, 서로 간 의견을 합치한다. 때로는 이런 언어로 인해 관계간 오해나 불화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인이 언어로 밋밋한 일상에서 가장 큰 도파민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비교와 가십이다. 언어를 활용한 이 수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점을 활용해 본인의 능력을 키운다거나 이익을 쟁취하지 못하고 이 두 가지 때문에 현대인은 무너진다. 그게 어쩌면 단군이래 가장 풍요로운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이 불행의 길로 가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먼저 비교중에서도 요즘은 타인과의 비교는 너무나 당연하니 둘째 치고, 본인의 이상향과의 비교가 큰 문제가 된다. 그 이상향으로부터 나오는 편협하고 일천한 잣대로 타인을 바라보니, 그 기준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사실 기적에 가깝다. 그게 연인이 됐든, 마음맞는 상사가 됐든 대개 99.9%는 다르다. 그래서 수많은 기회가 와도, 이를 잡지 못하고 아쉬운 인연을 마지못해 돌려보낸다. 지인 중에는 소개팅을 백번 넘게 했는데도 연애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가 있고, 결혼을 하겠다고 모두에게 선언을 한지 몇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감감무소식인 이들이 있다. 이들은 어쨌거나 남녀를 불문하고 본인만의 이상향과의 비교에서 자기 객관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오류에서모두 기인한 것이다. 가령,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있는 소개팅상대를 정하는 것도,
"나는 부모님이 노후준비가 된 분이었으면 좋겠어"
"연봉이 7천 이상이었으면 좋겠어"
"(여자) 키가 185 이상이었으면 좋겠어, (남자) 날씬한 슬렌더 체형이면 더 좋을 것 같아"
"학력은 적어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나왔으면 좋겠어"
“탈모는 없어야되고, 친구는 또 많으면 안되고...”
이 모든 건 각자의 이상향에 맞는 사람이고, 이를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스스로와의 타협선을 이끌어갈 줄 알아야 하는데 단 하나도 놓지 못한다. 그 와중에 주변에서는 남친이 샤넬백을 사줬다느니, 시그니엘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느니, 우린 서울에 아파트를 샀다느니 이런 타인과의 비교가 추가될 때 비로소 삶에 불행이 온전히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결혼빨리하고 싶고, 연애 빨리 하고 싶단다. 이 상황을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렇게 연애/결혼상대를 고르는 건 사실상 시장통에 물건짝보다 못한 거다. 백화점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향수나 옷보다 못한 거다. 심지어 백화점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옷들은 백화점크기,제품의 특성 및 소비자의 동선에 맞게 순서대로 진열되어있는데 이건 그렇지도 않다. 그냥 '융단폭격'을 하는 것처럼 많은 시도를 통해 내 잣대와 기준에 맞는 상대를 고르고 싶은 것뿐. 인간이 가진 이 언어라는 장점을 가장 비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케이스가 바로 이 '비교'다.
타인과의 비교도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내 잣대와의비교가 현실과 괴리감이 너무 심하니, 본인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 같고, 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이나 자신감을 찾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누구나 인정하는 직업이나 지위를 아직 쟁취하지 못한가령, 취업준비생이라던가, 고시생이라던가, 사업이 힘든 친구라던가, 일용직을 전전하는 친구라던가 삶이어려운 변곡점을 맞이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30대 중반을 들어서면 이런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데 이들은 계속 삶의 푸념만 늘어나고 주위사람은 위로를 해주면서도 지쳐 나가떨어지고,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비교' 하나에 삶이 나락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본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개발하려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가십은 어떨까. 지금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옆 테이블에 아주머니 두 분이서 대화를 나눈다. 본인 아들이 고3인데 누구는 스페인어를 배우러 어느 학원에 갔는데 몇 달 만에 자격증을 땄단다. 그게 거짓말이 아닐까 그냥 자랑하는 것 같은데 확인할 길이 없다며 의심을 막 하시더니, 막상 또 본인 아들도 제2외국어 학원을 보내야 하냐고 걱정하신다. 그야말로 그냥 가십거리인 것이다. 누구 씹을 사람, 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상대가 관심 있어할 주제가 없는가. 이 주제들의 대부분은 사실 남얘기다. 내 얘기는 스스로 희화화하면서 웃기기 싫거든. 쪽팔리고 내가 상대보다 낮아 보이니까. 비단 이 아주머니 둘 뿐만 아니라 카페나 식당이나 일반인 두세 명이 모였을 때 하는 얘기 대부분이 그렇다. 사실 사회/경제의 현안이나, 삶의 질을 올려줄 수 있는 방법이라던가,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인류의 발전이나, 정치적 투명성, 부유한 개인과 국가 같은 진정성 있고 중요한 현안을 기대한 것도 아니다. 그냥 사실상 아무 중요치않은 남 얘기밖에 하지 않는다. 칭찬보다는 그중에서 남에 대한 질투와 욕의 비중이 더 많겠지. 왜? 그래야 더 재밌거든 대화가.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옆집 친구가 매일 퇴근 후 영어공부를 하면서 자기계발하는 걸 가십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친한 누나가 자녀를 건강하게 출산해 부럽다는 얘기를 가십으로 하지 않는다. 내 친구는 성격이 너무 좋고, 공부도잘하고, 돈도 많다고 가십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면? 영어를 못해 승진시험에 떨어진 걸 얘기하고, 누군가 유산을 하거나 난임에 대한 고민이 있다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친구가 성격이 이상하고 힘든 걸 이야기한다. '샤덴프로이데'.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것이 보통가십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든, 술을 마시든 뭐든. 이는 성별이나 나이, 지역, 모든 걸 불문하고 같다. 예를 들어보자.
취업준비생끼리 모이면 "누구는 어디 취업했다더라, 누구는 대기업에 갔다더라, 운이 좋았네, 연봉이 얼마라더라", 같은 직장인 둘이 모이면 "누구는 이번에 무슨 부서를 갔다더라", "누구는 이번에 초고속으로 승진을 했다더라", 오랜 친구끼리 동창회를 해도 "걔는 요즘 뭐 하고 지내? 연락돼?" 늘 똑같은 내러티브다.
결국 이 가십이 시간을 낭비하고, 각자 스스로와 타인과의 비교를 낳는다. 이는 자연스레 본인의 잣대의 기준을 상향평준화시키고, 그 잣대를 더 포기를 못하게 되는 무한악순환의 굴레가 펼쳐진다. 결국 언어로 만들어진 도파민이 불행을 낳는 격이다. 현대인은 뜨겁게 달궈진 팝콘 메이커 안에서 튀겨지는 팝콘브레인이다. 강한 자극 없이는 이 지루한 일상을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한 개인은 현실에 찌들어 서서히 꿈을 잃어가고 불행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언어를 활용해 창작을 하고, 문화를 만들고, 연대를 하고, 서로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선한 가치와 영향력을 제공하여야 하는 판국에 얼마나 이 현상이 아쉬운지 모른다. 내가 무심코 그러지는 않았나, 현대인을 자극해 도파민을 분출시킬수 있는 수단은 언어를 이처럼 악용하는 방법밖에 없는 걸까, 언어가 삶에 밀접한 사람으로써 나 스스로도 고민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