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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력이 좋다는 진짜 의미

필력과 꾸준함에 대하여

by 홍그리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글을 꾸준히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들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주변에 참 많다.

잘 쓰는 글이라고 평가한다는 의미 자체는 주관적인 가치가 개입된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꽤나 사실에 입각해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얘기이기에 여기에 대한답은 철저히 나만의 시선에서 볼 것이고, 전자는 객관적으로 이성적 가치로만 한번 바라보겠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느냐에 대한 답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은 '잘 가르치는 것'에 능력이있는 것이지, 실제로 해당과목 문제를 더 잘 풀고 지식이 많은 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도리어 이런 분들이 가르치는 것에는 재능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식이다. 유명작가가 "이렇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라고 답한다 해서 그걸 그대로 따라 해서 책을 내고, 등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렇게 주관적인 정답 앞에 '그나마' 공통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결국 ‘심플’의 영역에서 수렴된다. Simple is best. 본인이 지나치다고 여길 만큼의 간결함이 요구된다는 것. 실제로,

'아, 이 정도는 너무 과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 때 그 글은 완벽한 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말과 글이 장황하다고 해서, 길다고 해서 좋은 것은 딱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논리적인 문제라던가, 해석이라던가, 사회이슈라던가. 그게 아니라면 아니면 쿠션어다. 가령 상대에게 어떤 부탁을 할 때에, '번거로우시겠지만~', '바쁘시겠지만', '혹시 괜찮으시면~' 이런 식으로 앞에 쿠션을 받쳐주는 단어들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하고 서로 간 원활한 의사소통을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이 두 가지 경우 말고는 그냥 무조건 간결한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이다. 아니, 평생을 그렇게 믿으면서 글을 썼고, 지금도그렇게 글을 써오고 있다. 다음 글을 보자.

봄에 대해 말하는 두 사람이 있다.


A: 봄이 왔다.


B: 바람의 방향과 공기의 내음이 변했다. 대지는 희고 차디찬 풍경에서 새로운 생명들의 축복으로 화려한 색으로 환복 했고, 그 밑에서 얼어붙었던 물이 오랜만의 자유를 맞아 세차게 달리며 음악을 연주했다.

봄의 시작이었다.


자, 어떤 글이 더 잘 쓴 글이라 여겨지는가? 많은 사람들이 B를 꼽는다. 감성적이고, 필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사실 필력이 좋은 건 A다. B의 글을 유심히 뜯어보자면 장점은 글쎄. 마지막 '봄의 시작이었다'라는 미괄식 문장에 힘이 실리고, 여운이 남는다는 것? 그거말고는 없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문장이 장황하다.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안달은 나있는데 억지로 본인만의 어떤 아집을 놓지 못한 채 글을 끌어가는 느낌이다. 뒤에 '봄의 시작이었다'라는 문장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는 필력이 좋다고 할 수 없다. 봄이 왔다고 명징하고 분명하게 알리는 A가 훨씬 글을 잘 쓴 것이고, 필력이 좋은 것이다. 놀랍게도. 왜냐? 근거는 명확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알아듣기 쉬운 전달력을 가지고 있거든 A의 문장이. 내가 간결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것이다. 글은 그게 수필이든 소설이든 시든 비문학이든 인간이 결국 말로 하지 못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자, 그렇다면 독자가 쉽게 알아듣게 적어야 할 것이 아닌가? 간결하게 적으면 아주 높은 확률로 독자가 알아듣기

가 편하다. 유아용 책이 그림만 많고 큰 글씨로 몇 자 안 나와있는 것만 보면 답이 나온다. 결국 간결함이 내재된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잘 쓰는 사람이고, 필력이 우수한 사람이다. 답은 이미 고민, 질문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 ‘답정너’스러운 이슈다. 내가 가장 먼저 간결함을 위해 무언가 바로 실천해 보겠다!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접속사절제와 단순반복을 지양하는 것부터가 가장 쉽고 편하다. 이를 또 무턱대고 없애버리는 것보다 문맥에 맞게 없애야 하는데, 이는 또 다음 기회에 다루어보겠다.


다음은 배우 유아인이 과거에 쓴 글을 보자.


입과 주둥이, 목소리와 개소리, 관용 안의 유머와 그 밖의 천박함, 선의와 악의, 의지와 무지, 포용과 포기. 충분히 선택 가능한 한 장 차의 양식들. 뾰루지를 거울에 비추듯, 늘어나는 주름에 기름을 떡칠하듯, 어금니에 낀 고춧가루를 후벼 파듯. 그리 살자고 휴먼 비-잉.우리의 존엄함.


누가 보면 뇌섹남에, 본인만의 감성이 충만하고, 필력이 최고라고 할만한 글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와, 역시 배우는 달라도 뭐가 달라!


자, 근데 잘 파헤쳐보면 글 자체가 장황하고, 비문과 수사가 많으며, 한껏 멋을 부렸다. 멋은 부려도 상관없는데 멋을 부린 게 지나치게 티가 난다는 게 문제다. 아무리 잘생기거나 이뻐도 타인이 그렇게 인정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지, 본인이 본인 잘 생긴 걸 알고 재수 없게 군다면 의미가 있나? 왜 멋 부린 단어를 쓰는지를 보면 그래야만 있어 보이거든. 멋을 부리려면 글에는 적당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앞선 <A>가 말한 봄에 대한 예시처럼, 멋을 부리려면 그냥 '봄이 왔다'가 아니라, '얼어붙은 물이 음악을 연주하듯 봄이 왔다.'라고 쓰거나 멋에 있어서도 적당히 부려야 그 노력에 걸맞은 기교를 독자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근데 이 정도 멋을 부리겠다는 의도는 사실상 책이나, 영화나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언가 영감을 떠올려 쓴 본인의 글이라기보다는, 본인만의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잡생각에 의지했을 확률이 높다.


멋을 부리기 위해선 새로운 기가 막힌 단어를 생각해야 되고, 그러면 비유가 많아지고, 문장이 길어지고, 다시 심플함과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좋지 못한글이 되는 무한 악순환. 결국은 뭐다? 직설적이고, 짧은 글. 그것이 가장 좋은 글이다.


다음은 글에 있어서의 꾸준함. 이건 내가 어떤 무언가로부터 글로 연결시킬 수 있냐의 문제 같다.

가령 영화를 보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콘서트를 가거나, 여행을 간다 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라면 이를 영상으로 담고, 화가라면 그림을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머리와눈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은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그시간을 추억하겠지. 근데 그 순간을 글로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게 작가다. 그 사람이 작가가 아니면 뭐라고 할 수 있나. 그냥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닌 본인이마음에 우러나 글을 쓰고 싶어서라면 그게 작가다.

그런 연결고리를 글로써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그 마음이 실제로 본인이 안 든다 할지라도, 그렇게 믿고 싶어서 매일같이 '습관화'를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전자처럼 변한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내가그랬으니까. 직접 겪은 걸 얘기하는 중이다. 그게 습관화가 되면 영화를 봐도, 의미 있는 유튜브 영상하나를 봐도, 여행을 가도 내가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글로 풀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습관화라는 건 그냥 내가 노력한다고 일상 속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는 듯한 특정 계기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근데 이 특정계기라 함은 대개 본인의 트라우마라던지, 아픈 기억이라던지, 사고 혹은 결핍 등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가깝다. 스스로가 바닥을 찍어 영혼이 녹슬고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때라던가, 아무리 씻어도 쉽게 씻겨 내려가지 않는 깊게 파인 상처라던가, 내가 걷는 이 진흙탕이 끝없이 계속될 거라는 망상이 자리할 때. 이런 희망의 부재 속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진심을 활자로 남길 때 그것이 보통 본인을 살게 하는 출구가 되고, 그게 습관화로 이어진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글을 잘 쓴다는 것의 정의와 꾸준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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