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걸림돌, 자존심
Don't look down on me.
본인에게 누군가 무례하게 굴거나, 얕볼 때 쓰는 말이다. 이 단어 뒤에는 당연히 상대보다 못한 무언가가 오겠지. 어려서, 못생겨서, 돈이 없어서,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늙었다고 무시하지 마라고. 대부분 본인이 남들이 보기에 열등하거나 보통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면에서 전혀 비비지 못할 때 이런 말이 더 자주 들릴 테다. 문장 자체를 직역해도 나를 낮게 보지 말라는 뜻이기에, 이 말을 하는 대상은 상대에게 참고 참다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선을 지켜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특히 한국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적, 돈, 자산, 키, 스펙, 사는 곳, 직업, 나이, 외모, 몸매, 집안 등 모든 부분을 서열화해 줄 세우기 때문에 누군가 본인을 무시하지 않아도 자기 방어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말이다.
당연히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되고, 근거 없이 무시해서도 안된다. 최근에 다양한 곳에서 꽤나 다양한 환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 자리가 있었다. 한 개인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3인칭 관점에서 그들 전체를 감히 바라보자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라. 각자 잘하는 분야가 각기 다르고, 정도도 다르며, 못하는 것도 다르다. 심지어 누군가는 A를 잘하는데, A를 잘해도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조직에 있는 사람도 있고, A를 조금밖에 못하는데도 치켜세워주는 곳에 있는 이들도 있다. 다른 조직에서는 A를 거들떠도 안 보고, B만 치켜세운다. 살아온 환경과 배운 교육에 따라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하나가 본인 성향이 안 맞거나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다 해서 그 사람이 못난 사람이 아니란 거다. 근데 우리가 다니는 회사라는 곳은 어떤가. 회사는 수익을 내고 돈을 벌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특성과 능력을 일일이 반영할 여력이 없다. 인사팀이 있다한들, 최소한 조직의 관리차원에서 그리고 조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굴리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내가 관심 있고 잘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만약 본인이 그걸 하고 있다면 운이 타고난 것이므로, 그 회사 아주 오랫동안 근속하길 바란다. 자, 본인과 전혀 맞지 않는 업무 혹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업무를 맡았다 해보자. 처음이라 못한다. 적응하는데 시간이 (업무에 능숙하거나 잘하는 이들보다) 조금 오래 걸린다. 그러면 그는 상사에게 낙인찍히고 전사에 소문난다. 그리고 이상한 곳에 보내버린다. 그리고 그는 ‘소문에 의해’ 자신감이 꺾여 주눅 들게 되고, 퍼포먼스가 꺾여 계속 쉬운 일, 허드렛일만 하게 되고 그렇게 악순환이 펼쳐진다. 잘하다가 위에서 한 번에 고꾸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즘 인기인 ‘서울 자가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야기’를 봐라. 하루아침에 지방발령 내버리지 않나.
뭐가 됐든 그 낙인이 언제든 이 사회는 냉정해서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 예시만 봐도 현대인은 누군가를 실제로 깔보고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바짝 차리고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 본인에게 뭐라 하거나 무시한다 싶으면 신경이 곤두서고, 방어기제로 마음에도 없는 타인을 까내리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순간에 내 역량을 아주 높일 수는 없고, 남을 까내려야만 내 자리가 보전된다. 까내리진 않는다 해도 최소한 내 알빠아니라는 소위 ‘알빠노’ 마인드로 가거나, 타인대비 본인만의 우월점을 찾아 혼자 정신승리하거나,근거 없는 자존감으로 온 정신을 무장하고 집 밖을 나서야 한다. 이 얘기를 할 때 생각나는 지인들이 있는데 대부분 진솔한 얘기를 나눠보면 과거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거나, 트라우마로 본인만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속은 한없이 여린데, 그렇게라도 해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집에 오면 가면을 내려놓는다.
자, 그런데 이 정도면 아주 양반인 사례다. 가장 큰 부작용은 뭐냐. 자기 체면에 심취해서 본인이 진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게 가장 문제다. 왜?
본인의 능력치는 제자리인데, 본인의 우월감으로 과대망상을 하고 있으니 본인이 그에 상응하는 어떤 대가와 보상은 받아야 한다는 논리. 그렇게 그는 철저하게 인간관계, 연애, 결혼, 취업 등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이 퀘스트에서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겪는다.
자, 먼저 연애와 결혼을 보자. 연애면 뭐 외적인 모습에끌려 어린 마음에 아무나 만날 수 있다. 또 그때는 순수하기라도 하니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혼에서 이들이 원하는 조건은 대개 이렇다.
1. 서울 경기 자가일 것
2. 대기업 혹은 공기업, 전문직에 종사할 것
3. 명문대거나 최소 인서울 대학교 출신일 것
4. 최소 자산 1억 이상/ 월급 350~400 이상일 것.
5. 자차는 꼭 있을 것 (데이트하려면)
6. 남자는 유머러스하고, 탈모가 없을 것 (여성은 가정적이고 집안일을 해야 하고, 맞벌이를 꼭 해야 함)
7. 부모님 노후준비가 되어있을 것.
과장 보태서 진짜 이 정도다. 심지어 대충 생각나는 것만 적었다. 여기서 남성/여성에 따라 필요조건은 조금 바뀌겠지만, 이것도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남자는 여자가 ‘삼천충’이니 이런 거 말고 진짜 최소한 못해도 결혼 전 5천만 원 이상은 저축을 해야 하고, 여자 입장에서 남자는 집을 해오거나, 1억 이상은 모아야 한다. 이러니 결혼을 어떻게 하고 출산을 어떻게 하겠나. 실제로 지금 30대 중반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아직 결혼 못한 이들은 다 이렇다. 문제는 본인이 이 정도의 상대를 만나고 싶다는 희망사항이 아니고 본인은 ‘당연히’ 이 정도의 상대와 결혼해야만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다. 'Look down on me'라고 무시하지 말고 판단하지도 말고 과소평가하지도 말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결국 본인들은 과대망상에 빠져 이런 사람만 원하고 있다.
회사도 똑같다. 중소기업에 가면 마치 인생이 망한 것처럼 여기고, 월급 250만 원 받으면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고 노후준비도 못하고 그냥 가난하게 살다가 독거노인돼서 죽는 줄 안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선례는 내 경험담이지만, 만약 여러분이 이와 같은 주변 사람이 있다면 무시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 전에 상대방이 했던 그 거침없는 단어가 실제로 객관성과 진정성이 있어서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시는 결국 누가 하는 거고, 누가 받는 걸까. 그들은 언제쯤 본인의 정도에 맞는 사람과 맞는 회사, 맞는 무언가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 혐오사회,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일까, 아니면 한 개인의 근거 없는 욕심일까.
하나 확실한 걸 말해주고 싶다. 이리저리 재다 타이밍 놓치는 인생보다 (그게 뭐가 됐든), 정도에 맞게 소박하게 타이밍에 맞춰 하나둘 해내가는 사람들이 훨씬 잘 산다. 이건 진리다. 단 한 번도 예외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뭐든 성장속도가 전자보다 2배~3배 빠르다. 이래서 매몰이 무서운 거고, 한 바구니에 모든 달걀을 담지 마라고 하는 이유지 않을까. 편협한 사고, 일천한 경험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은 이렇게나 본인의 삶을 망친다. 한국인에겐 이젠 자존심은 좀 내려놓고, 자존감을 올려야 할 때이지 않을까 싶다. 자존심은 밥 먹여 주지 않는다. 이젠 나도 답답해서 말할 수 있다.
본인을 낮게 보지 마라고만 하지 마시고, 이젠 진짜 눈을 좀 낮춰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