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인의 번아웃이란...
나는 현재 영국에서 반려인 1명, 그리고 반려견 1마리와 살고 있다.
그리고 최근 나는 NHS의 도움으로 성인자폐를 진단받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금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나는, 도저히 내 몸 밖으로 이 모든 생각을 토해내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는 생각에 다시 손가락을 키보드에 놓았다.
어르신(?)들이 그러셨다.
뭐 잘난 뉴스라고 이리저리 공개적으로 인터넷에 떠드냐고.
끊임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해내는 두뇌덕에, 머릿속에서부터 위장까지, 이 글자들은 마침내 게워내지 않으면, 끝내 나를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고 토로하고 싶지만, 왜 토로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내 마음입니다 어르신들.
자폐를 진단받자마자 넷플릭스에서 만든 리얼리티 데이팅 쇼 - Love in Spectrum을 다시 보았다. 남편은 도저히 손발이 오그라들어 못 보겠다고 하는 걸, 나 혼자라도 보겠다며, 티브이를 독차지하고 정주행을 했다.
그중에서 영국에 사는 어떤 여자 자폐인이 본인의 증상에 대해서 언급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발언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I will be Unapologetically Autistic!
당당하게 자폐인으로 살기.
당당하게 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당당하게 장애인이나, 당당하게 실업인으로 살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영구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 주기, 및 사회적으로 수입이 없는 이 두 가지의 것이 나에게는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는다. )
그런데, 그렇게 당당하게 자폐인으로 살겠다니, 심지어 그녀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소수에 속하는 바이섹슈얼이기도 했다. 아.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라는 감탄이 들어, 저 문장이 그토록 지워지지 않았던 걸까?
나는 내가 다니던 대학교 유학생, 현지 재학생 포함, 우리 반에서 "갭이어(Gap Year)"를 가지지 않는 유일한 학생에 속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대학교 3학년부터 2025년 여름까지 나는 단 한 달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미련하게 다들 일만 한다고, "Get a life!"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그렇게 일했다. 나는 우리 엄마에게서 어릴 적부터, 일은 자기의 150%까지 뽑아내며, 열심히 소처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Covid-19 판데믹이 떠들썩하게 세상을 뒤집어놓은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굳이 굳이 나의 천직을 찾은 것(?) 같다며, 스스로 당당히 커리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만들기 위해, 다시 독학하고, 다시 사람들에게 콜드메일링을 돌리며, 그렇게 새로운 업을 가졌다.
새로운 직업이다 보니, 대학교 때부터 열심히 이 업을 위해서 노력해 온 사람들보다, 진액만 뽑아서 먹는다는 생각으로, 열 배는 더 열심히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며, 주말도 쉬지 않고, 디자인하고,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또 만들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마치 주말에도 쉴 것 다 쉬고, 놀 것 다 놀며 일하는 사람처럼 주중에는 매서운 눈초리의 영국인들 사이에서 또 열심히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게 나를 한걸음 한걸음, 죽였다.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보여주려고 한 걸까?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면, 내 이 보잘것없는 인생이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에게 잘했다고 주는 상이나, 안정 없이, 무조건적으로 타인이 주는 상과 인정만이 나의 앞길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타인에게 매달렸다.
아무도 나에게 주말에 일할래? 돈을 주거나,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 스스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나의 결과물들을 더 반짝이고 특별하게 포장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아이도 없고, 친구도 가족도 없는 단조로운 영국생활,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을 '일'로 돌아가자 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그리고 2년 반 후, 회사 HQ 및 글로벌 오피스 전반에 걸쳐 여러 번의 레이오프(Layoff)가 파도를 치며 우리 게에도 다가왔고, 몇 번을 겪고 나서,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베테랑이 다된 나는, 나에게도 다가올 파도의 물결을 인지하지 못했다.
며칠 뒤, 나는 인사팀도 아니고, 같은 부서의 디자이너가 개인연차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개인 링크드인 DM을 보내, 나의 명예퇴직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나도 남들에게 몇 번이나 복붙 해서 보내봤던, "우리 그럼 다른 곳에서 만날 때까지... 안녕히…"라고 끝나는 그 짧디 짧은 형식적인 문장에, 나는 또 넋이 나갔다.
이게 만우절장난인가 싶어, 나는 내 연차도중에도 회사 메신저로 들어가, 인사팀, 나의 라인매니저, 그위의 상사에게까지 이메일을 보내 확인해야 했고, 그 와중에도 인사팀이 아니면 자기는 아는 정보가 없다며, 나를 시한폭탄 돌리듯이 이리저리 굴렸다.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며, 막 이사해서 정신없이 쌓여있는 박스를 사이로, 나는 이 역한 정보들을 혼자 소화시키기 위해, 열심이었다.
몇 번의 정성스러운 읽씹과 인사팀 부재중에, 나는 결국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내놓은 연차가 다 끝난 그날, 이제 막 입사해, 레이오프 상황들을 처리하고 있던 인사팀 매니저에게서 미팅 초대를 받았다.
그 미팅 안에서, 나는 몇 번이고 나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던 상황을 맞이했고, 나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주어졌다;
첫째, 현재부로 내가 있는 오피스의 프로덕트 디자인팀은 없어질 것이며, 나에게는 다른 부서로 이동할 수 있는, 교육, 및 인사팀서포트가 주어진다.
둘째, 명예퇴직을 받아들인다면, 약 xx파운드정도의 퇴직금이 주어지고, 여기에 노고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더 웃돈을 넣어주겠다.
... 뭐, 자본주의의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 별수 있나. 나는 2번을 택했다. 어차피, 1번은 있으나 마나 한 제안인걸 이미 그전의 레이오프 선례를 통해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나의 두뇌는 정보처리를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어떻게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퇴직 처리를 했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건, 회사에서 받았던 컴퓨터를 보내야 하는데 런던까지 내 돈 들여가며, 가기는 불편하다고 했더니, 바로 회사 택배회사를 보내, 내 노트북을 받아간, 인사팀의 빠른 일처리에 감탄했다는 것...
그 외는 기억나는 게 없어, 남편이 그때당시의 일을 말하면, "내가 언제?"가 말버릇처럼 나왔다. 그것뿐이다.
몸에 거의 모든 기능이 멈춘 듯한 나는, 그 후로 약 5주에서 6주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도, 아무것도 하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있을 정도에 밥만 먹고,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티브이를 보거나,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매일매일이 식은땀에 절은 수면상태였고, 항상 두통과 오한에 시달리고, 또 시달렸다.
수입이 있는 형태의 일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내 좌뇌우뇌를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정말 희한하게도 나의 몸은 침대에 끈끈이주걱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에 사로잡힌 파리처럼 침대에서 해어 나올 수가 없었다.
매일이 "게으른" 나였고.
속으로는 나조차도 너는 게으르다고 다그치고 있었으면서도, 타인이 나에게 게으름의 '게'자라도 꺼내면, 불같이 화냈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눈치 보며 하지 못하는 날에는, 나 스스로가 자해를 했다.
시리얼이 시리얼통에서 나오지 않는다며,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에 소리를 질렀고, 바로 내 안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내 머리를 찧었다. 미친 듯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체, 이 길이 오직 답이라는 듯이 미친 듯이 찧었다.
이 상황이 무서웠던 남편과, 너무 충격이던 나의 엄마는, 그렇게 찧고 나서 미친 듯이 구석에서 우는 나를 그냥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왜 내가 이렇게 "미칠 광(狂)"으로 변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털어놔야겠다는 생각뿐.
누군가에게 털어놓자면, 남편, 가족, 시부모, 말 못 하는 짐승 말고, 정말 내 말을 "말" 그대로 알아듣는 그런 사람을 만나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신경다양성 및 심리상담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찾았다. 그중에서도 나의 조건은 '그 사람도 신경다양성 장애 중 하나를 앓고 있을 것'.
잘 맞는 심리상담사 혹은 정신과의사를 찾기도 힘든데, 그 사람이 저런 장애까지 앓고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니... 어지간하면 그래도 구글이니까(?) 찾아지겠지 했것만.
한 달 두 달 세 달이 넘어가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질 수 없다 하며, 키워드 하나씩 쳐가며, 관련 있는 사람을 찾았고, 거기서 또 필터링하고, 또 전화컨설팅으로 구별해 내고... 그걸 반복하기를 몇십 번? 그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그 사람과 무려 30분간 (보통 무료 전화는 15분 정도이다) 통화하며, 울며불며, 정말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1년여간 나는 생판 처음 본 외국의 타인에게, 그저 내가 어쩌다 머리까지 바닥에 찧으며, 16 시간 내리 침대에 붙어 있었음에도, 왜 잠을 한 시간도 못 잔 것 같은 피로함을 느끼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하다고 말했다. 게워내고 또 게워냈다.
치유가 되었느냐, 치료가 되느냐.. 전혀. 그건 치료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내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댈 수 있는 서포트 핫라인하나를 뚫었다는 느낌. 그 느낌 하나로도 나는 숨통이 트였다.
이 사람은 내가 지금 같은 말을 반복해도 뭘 말하고 있는 건지 안다는 그런 인간.
더 이상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보고 말할 때 내가 내가 아니어야 하는 상황이, 없어도 되는 그런 인간, 사람이 있다니, 물론 비싸다. 세상 모든 좋은 것은 가격표를 공개하는 순간, 깬다, 와장창....
왜 우리는 안 그래도 힘든 하루를, 경제적 이슈, 돈 부족으로 두 배는 더 힘들게 해야 되는 걸까.
당장 모아놓은 돈으로 큰 문제는 안 되겠지만, 이것 조차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곧이다.
자폐의 번아웃 본인이 사는 의료기관 GP에서 진단받고 신청만 한다면 최대 2주에서 매니저 재량으로 1달 정도까지 쉴 수 있다.
나는 이제 것 이런 정신과 및 신경다양성 장애의 문제는 인사팀 말 따라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 휴가는 한마디 꺼내지도 못했다. 상담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3일 연속으로 일하는 도중에 겪는 공황장애와 식은땀으로 자의 퇴사를 할뻔했다.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인사팀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너도 당당히 sick leave를 내고 쉴 수 있다.'라는 말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나는.. 나의 머릿속에는 '큰일 났다'라는 글자만 머릿속에 에러창 뜨듯이 연속으로 떠다녔다.
"게으름" "꾀병"은 언제 즈음, 게으름과 꾀병이 아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