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롱 비거니스트다
놀랍겠지만, 당신도 그렇다.
세상에는 자신이 비거니스트라는 것을 아는 사람과 비거니스트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비거니스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비거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인정하고(!) 비거니스트로 사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비거니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좀 껄끄러워서(?) 비거니스트라는 것을 걸 부정하며 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러니까 결국 세상은 모두 비거니스트들로 이루어져 있다. 고기를 먹는 당신도 비거니스트라는 뜻이다. 왜냐면, 당신이 고기를 먹는 이유가 그 고기가 살아있던 형태의 동물을 죽여서 먹어치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먹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동물을 꽤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동물 친구들이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살생을 위해 육식하는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채식주의자라는 말은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도 알고 있다. 무엇이든, ○○주의자가 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세상천지에 아무것도 단정하지 말자고 매일 같이 다짐을 하면서, 정작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대 사회에서, 비거니스트란 극강의 편식쟁이와 다를 바 없다.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맙소사. 인간이 풀만(?) 먹다니. 사람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무섭다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가 걱정하실만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태생부터 비거니스트로 태어났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나도 내가 비거니스트라는 것을 모른 채로 거의 30년을 살았다. 그러나 분명히, 과거로부터 나는 비거니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면 나는 밥과 조미김으로 자라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김을 엄청 좋아했고 그래서 한국인 대부분의 주식인 쌀과 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김 한 통이면 밥 한 그릇 정도야 우습게 먹을 수 있다. 학부 시절에도, 밤샘 작업을 할 때에 편의점에 가면 컵라면보다 삼각김밥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공개적인 주의자가 되기로 한 것은 독일에 와서였다. 독일에 오고 나서야 주의자가 될 용기가 생긴 게 아니라, 독일에 오니 주의자가 되지 않을 이유가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불어, 내가 보지 말아야 할 영상을 보고야 말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본 영상은 태어나자마자 믹서에 갈려버리는 수평아리들의 영상이었다. 희한하게도, 혹은 전혀 희한하지 않게도, 나는 평생 살면서 내가 먹는 닭고기가 모두 암컷인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수컷으로 태어난 병아리들이 태어난 지 3초 만에 믹서기에 갈린다는 건 더더욱이나 몰랐다.
그 영상을 보고 나서, 나는 달걀을 깰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일에서 지내면서 호기심으로 비건이나 베지테리언 식품을 사서 먹어보던 나는, 본격적으로 '비육식'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Cowspiracy( 2014), What the health(2017) 같은 영화들을 시작으로 책도 읽고 인터넷에서도 많은 자료들을 접했다.
이후의 실천은 훨씬 쉬웠다. 어차피 지금 나는 독일에 혼자 있고, 내가 스스로 꾸려가는 생활에 대해 간섭할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었다. 얼결에 초기 몇 달간을 아주 엄격한 비건으로 시작하면서(코로나 덕분에 외출이 제한되었던 덕분이다) 비건 생활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같다. 그 이후에 내가 나이롱 비거니스트가 되면서, 한국의 가족들이 내 채식을 완전히 이해해 주는 것도 지속적인 비건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나이롱 비거니스트가 되면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는 날들을 살게 된다. 내가 어떤 식으로 나의 비건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지, 왜 고기를 먹는 사람들도 모두 비거니스트인지, 더 나아가 왜 우리가 비거니스트가 되어야 하는지, 나이롱인데도 불구하고 비거니스트로 사는 건 어떤지 등에 대해서 더 많이 알리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건 생활을 겁내는 사람들, 자신이 비거니스트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건 생활을 시작할 용기를 주고 싶다.
나는 비거니스트가 된 지 5년 차 되었다.
물론 비건 생활을 극악무도한 풀때기만 먹는 생활로 여기며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늘 원하는 '엄밀함'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나는 나이롱 비거니스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이롱 비거니스트인 내가 너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