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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tyle by AK Oct 04. 2024

김치 부심

'엄마 김장해?'

딸아이가 묻는다. 한여름 6월 말이다. 갑자기 김치에 꽂힌 내가 배추 3통을 주문해 김치를 만들고 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김치는 10번도 안 만들어 본 것 같다.


최초로 김치를 만든 때는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다음날이었다. HP의 직원이었던 전남편을 따라 우리 가족은 1996년 여름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회사 중 하나답게 HP는 직원 복지에도 상당히 후했다. 해외에서 이주한 리로케이션 ( Relocation) 정책은 주재원과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주재하는 3년 동안 제공되는 가족의 각 구성원마다의 튜더 서비스, 다시 말해 가족 한 사람당 한 명의 개인 영어 교사가 있어서 주재원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까지도 학교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있어 영어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개인 교사를 제공하는 리로케이션 회사는 여러 가지 다른 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어서 이곳의 문화, 생활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연고 없이 살고 있던 미국생활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빠와 아이들을 위한 야구경기 관람이라던가, 서부시대를 그대로 돼 살려놓은 공원을 방문해 Gold Panning을 하는 경험, Thanksgiving Dinner 쿠킹 클래스, 리스 (Wreath) 만들기 클래스, 모든 HP 주재원과 가족의 파티등 매달 무수한 액티비티가 제공되기도 했다. 물론 이는 모두 무료로 HP 가 이 리로케이션 회사에 지불하는 제도이다.


어쨌든 직원 복지 갑의 회사에 다니는 덕에 미국으로 처음 온 날 우리 다섯 식구가 묵은 곳은 좁아터진 호텔방이 아닌 복층으로 된 스위트 룸이었는데, 최고 호텔의 스위트 룸은 아니고, 우리처럼 롱 텀 거주인을 위한 호텔인 Residence Inn 중에서도 복층으로 꾸며 가족이 밥 해 먹으며 살 수 있는 곳이었다. 2층에 살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2층에 있는 침대방이며 아래층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이곳에서 우리는 집을 구해 나갈 때까지 한 달 이상을 머물렀다. 그때 30대 초반이던 나는 아이가 셋이 있었지만 김치를 한두 번 만든 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매번 배추를 절여놓고 충분히 기다리지를 못해 물이 흥건한 물김치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엄마 김치를 얻어먹었고 다시는 김치를 만들어 보지 않은 채 미국에 온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국에 오자마자 방문한 한국 마켓에서 불현듯 김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배추를 꽤 많이 샀던 것 같다. 젓갈에 고춧가루며, 마늘, 파 등등 재료를 사다가 그 복층 호텔 룸에서 마늘 냄새, 젓갈 냄새를 풍겨가며 열심히 만들었다. 한 달은 먹기에 넉넉할 정도로 많이 만든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의 한인 마켓은 만들어 파는 김치가 아주 발달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김치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지 파는 음식은 아니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커다란 유리병에 배추김치, 총각김치, 포기김치 등등 종류별로 팔고 있었다. 만들어 먹어야 하는 한국에서는 절대 안 만들다가, 사다 먹어도 되는 미국에 오자마자 두 팔 걷어붙이고 김치를 담그다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 우습다.


나의 김치 성향은 어려서부터 유별났다. 기본적으로 나는 김치를 잘 먹지 않았다. 김치와 밥이 어린 나에게는 매우 지루했다. 왜 매번 밥상에 김치가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총각김치와 오이소박이는 좋아했지만 배추김치는 영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방금 막 담그신 김치는 왜 그리 맛있던지, 나는 안 익은 생 김치나 달콤 새콤한 겉절이는 많이 좋아했다. 접시에 담긴 긴 포기김치를 길게 쭉 찢어서 먹는 김치 또한 내 스타일이다. 그 이외에는 음식점에서든 집에서든 일반 김치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김치를 안 좋아한 대신 내 여동생은 매번 밥을 먹고 나면 입가가 붉어질 정도로 김치를 먹어댄다. 참, 입맛이라는 게 이렇게 다르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겨도 나는 김치는 반찬으로 별로 내놓지 않았다. 그런데 이 김치가 다른 방법으로 조리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치볶음밥, 김치 볶음, 김치전 이렇게 세 가지는 내가 언제든 좋아하는 메뉴이다. 단, 김치찌개는 또 싫어한다. 아무래도 익힌 김치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찌개처럼 다른 맛이 섞이지 않은 김치 고유의 맛이 살아있는 음식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한국사람 치고는 김치 없는 삶을 살아왔건만, 그래도 나는 한국인이다. 이제 미국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김치는 떨어지지 않고 냉장고에 항상 있다. 김치가 떨어지면 남편이 코스트코에서 종갓집 배추김치를 사 온다. 어떤 때는 김치를 담근다고 배추를 사다 뭔가를 담그는데, 나는 이를 김치 샐러드라고 부른다. 제대로 풀을 하고 생강도 넣고 하는 김치가 아니라 절여진 배추에 액젓과 고춧가루, 마늘, 파만 넣고 버무려 먹기 때문에 거의 샐러드에 가깝다. 여전히 김치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몇 달 동안 한 번도 안 먹는 적도 있다. 가끔 너무 삭아서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역시 김치가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다. 언제든 당길 때 두부김치도 해 먹고, 김치전도 해 먹고, 김치볶음밥도 해 먹을 수 있는 김치. 이게 쟁여져 있어야 냉장고도 내 마음도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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