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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6. 2023

건승하기를

건승하기를


새해 인사를 전하는 메시지 발송 건수가 올해는 더 적다. 깜박하고 놓친 지인들에게 이제라도 인사를 챙길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는다. 이쯤의 나이와 경력이 되면 형식상이라도 새해 인사 명단은 해마다 길어질 줄 알았다. 명절 전 무료 메시지 제공 수만큼 연락처를 복사 붙여 넣던 발송 작업(?)은 이십 대까지, 의무감으로 수고와 시간을 들인 것도 몇 해 전으로 그쳤다. 메신저 대화창 목록에서 최신순으로, 마지막 대화가 한 달을 넘기지 않는 가까운 이들에게만 감사와 덕담을 보낸다. 호의보단 예의가 주를 이루는 관계에서 주고받는 뻔한 연하장 문구 같은 인사가 매년 어려워지는 건 나뿐일까. 


설 연휴를 앞두고 ‘건승하시길 빕니다.’ 메일 끝에 달린 문어체 인사에 답할 적당한 문장을 떠올리려 모니터를 노려본다. ‘건승을 빕니다’ 처음 들었을 땐 고어인 듯 낯선 표현에 상대의 나이부터 멋대로 가늠해 보기도 했다. 승에 집중하여 승리와 성공을 바라는 전투적 어감부터 떠올렸는데 완전히 틀린 연상이었다. 굳세다/건강하다 ‘건’에 주된 의미가 있는 ‘탈 없이 건강하다’를 뜻한다고. 건강이 첫 번째 새해 소망인 지금의 난, 메일 마지막 한 줄에 ‘굵게’ 옵션을 선택해 입력하며 주문처럼 웅얼거린다. 건승하시기를… 


새해맞이 야심찬 결심은 내 의지가 아닌 상황에 의해 작심삼일이 된다. 나에게 더 집중하기, 나만의 공간과 시간 늘리기의 다짐은 해가 바뀐 며칠 만에 꺾이고 만다. 연말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다는 남편과의 통화 후 크게 혼이 난 아이처럼 멍해져 휴대폰을 귀에 대고 얼어버렸다. 퇴근하자마자 수험생 성적표를 찾는 부모가 되어 검진센터 소견서 먼저 확인한다. 대학병원에서의 MRI 포함 각종 재검사로 새해 첫째 주부터 회사가 아닌 병원으로 매일 출근할 남편을 향해 눈을 흘긴다. 며칠 후 남편은 24시간 혈압측정기를 달고 있는 상태로 나를 맞는다. “내일까지 이러고 있으래. 잘 때도 빼지 말래.” 환자의 황송한 퇴근 환대를 받으며 정신이 든다. ‘나만의 시간이라고? 쳇, 누구 마음대로?’ 속내를 들켜버린 듯 민망함과 씁쓸함이 남는다. ‘알겠어요, 당분간은 제 자리를 지키며 욕심은 잠시 넣어둘게요!’


토일월화 3인 1조의 꼭 붙어 있던 시간을 보내고 설 연휴 마지막 날 외출 준비를 한다. 사전 공지한 개인 일정임에도 아이는 처음 듣는 듯 귀가 시간을 재차 묻는다. “잠시 좀 떨어져 있어 줄래?” 장난 섞인 말투로 농담인 듯 말하지만 진심이 숨겨 있단 걸 나도 아이도 알고 있다. 처음 가는 장소라 미리 검색하여 최소 환승 / 최소 시간 기준 별 선택 안을 따져본다. 올겨울 최강 한파, 서울지역 체감온도 영하 26도,,, 꼼짝 마! 잔뜩 겁을 주는 뉴스에도 내복을 껴입고 귀마개를 챙겨 집을 나선다. 위아래 꼼꼼하게 겹쳐 입은 옷의 무게는 둔한 압박이 아닌 든든한 지지와 포옹이다. 2023년 새로운 세상 하나에 뛰어들려 한파주의보 발효에 맞선 나를 본다. 정중앙 누름 못을 꽂고 가능한 만큼 펼쳐 공간과 거리를 조심스레 작도한다. 부끄럽지만 한 단어씩 힘을 주어 말할 용기를 내본다. 올해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 살아 볼 거야. 회사-집 반복적인 동선을 그리면서도 공간과 거리를 크게 벗어날까 습관적으로 발밑을 체크해온 내가, 예측 불가한 반전 곡선과 직선을 그리며 장면마다 자유로운 글쓰기를 꿈꿔 본다, 부디 건승하기를! 


January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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