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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작 Jul 10. 2022

기차를 타고

소희에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을 땐, 무작정 기차역으로 가. 가장 빠른 시간에 출발하는 아무 티켓이나 사는 거야. 이때 중요한 건, 도착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지. 어디든 여기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 자리는 창가 쪽이 좋겠어. 지루하도록 같은 모습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휙 바뀌어버리는 풍경이 꽤 자극적이거든. 기차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마. 폰을 만지지도, 사진을 찍지도, 무언갈 읽지도 마. 가만히, 이따끔 철로를 따라 덜컹이는 거대한 고체 덩어리에 몸을 맡기고 네 몸이 흔들리도록 놔둬. 그게 그저 소모적이라고 느껴도 어쩔 수 없어. 다른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 여행은 실패하는 거야. 아, 음악을 듣는 것 정도는 뭐, 용인할 만도 해.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멀쩡한 두 귀를 틀어 막고 아름답게 정제된 멜로디를 감상하는 것 대신 기차 소음과 주변 승객들의 말소리가 어울리는 거친 화음이 더 마음에 들 거야. 적어도 그 공간 안에서는.


어떤 사람이 있어. 난 처음에는 다른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조금은 차갑고, 조금은 방어적으로 그 사람을 대해. 필요할 때 말곤 전혀 말을 섞지 않는 거지. 이때는 상대방이 선뜻 친근함을 보이면 오히려 내 기분이 상하는 단계거든. 그렇게 하루, 이틀, 점점 그 사람을 보는 날이 많아져. 아침에 건네는 인사가 당연해지고 하루가 끝날 시점에 '내일 봬요.' 같은 마무리가 필요해지더라고. 마주 보면서 이야기할 때 둘 사이에 남는 공간이 조금 줄어들기도 하면서. 그게 좋은 건지는 아직 몰라. 하지만 자연스러운 변화야. 그 사람의 표정과 말투에도 점차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 사람에 맞춰 나도 어떤 패턴을 보여. 그 패턴이란 게 그 사람 눈에도 보이는 것 같아.


난 딱 여기까지가 좋아.

더한 건, 불편해.

누구를 만나든 말이야.


가끔 날 갑갑하게 누르는 이 무거움이 기압은 아닌 것 같아. 우리 몸은 공기의 무게를 느낄 수 없거든. 체내 압력과 대기압이 같아서. 어쨌든.

새로운 누군가를 알게 되고, 말을 섞고, 점차 일상을 말하게 될수록, 무언가를 공유하게 될수록 어떤 이물감이 느껴져. 시간이 지나면 점차 안으로 조여오는 벽으로 설계된 미로 안에 갇힌 것 같아. 막연하게 생각이 들어. 그만 다가오라고. 하지만, 멀어지지는 말라고. 그냥 나에게 잠깐 쉬는 시간을 달라고.


그럴 때 기차역으로 가는 거지.

그럴 때 나도 모르는 도착지로 떠나는 거지.

그곳에는 날 조이는 그 무엇도 없을 테니.


처음 기차역으로 갔을 때는 무서웠다? 내가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아서. 혹은 변할 것 같아서. 이건 마약도 아니고 담배도 아니야. 역류할 때까지 식도로 퍼붓는 술도 아니야. 그냥 기차역일 뿐이야. 출발지가 있고, 도착지가 있고, 그 두 곳을 잇는 철로가 있는 기차일 뿐이야. 그래도 내가 뭔가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 휴대폰과 지갑만 달랑 들고 기차를 타다니. 이런 적은 없었거든. 정신없이 펌프질을 해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어. 두 입술 사이가 조금만 벌어져도 그럴 것 같았어. 그래서 숨을 최대한 작게 쉬었지. 필요한 만큼만 쉬었지.

숨만 쉬어도 삶은 살아진다더라. 맞아. 내가 기차역에 있든, 학교에 있든, 그 어디에 있든 내 삶은 살아져. 아무것도 안 하면 살아져. 하지만 그냥 살아지는 대가일까? 꼭 그 값을 매기는 것차럼 내 등과 가슴에 조금씩 무게가 얹어지더라. 분명 내 하루는 평화로운데. 날 괴롭게 하려고 작정하는 사람은 없는데. 그냥 살아진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냥 사람을 만난다는 이유만으로도. 난 무게를 느낄 수 있더라.


그럴 땐 기차역으로 가.

나쁜 게 아니야. 이상한 게 아니야.

조금 다르고,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충전을 하는 거야.

다시 그냥 살아질 충전을 하는 거야.


그러니 너도 무게를 느끼는 날이면 기차역으로 떠나. 폰과 지갑만 챙겨서 기차를 타고 떠나.

떠난 뒤에는.

그렇게 무작정 몸을 실은 뒤에는.


다시 돌아와야 해.

다시 돌아오는 기차를 타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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