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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현이 Apr 16. 2022

아빠에 담긴 것


 ‘아빠’ 하면 난 오므라이스가 떠오른다. 

아빠는 종종 요리 데이를 가졌고 주력 메뉴는 오므라이스였다. 노랗고 매끈히 부쳐진 달걀지단 표면에 케첩으로 하트를 그리고 그 안에 각각 ‘나현’, ‘소현’ 우리의 이름을 적어줬는데 그게 어찌나 대단해 보이던지.  난 정말로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케첩으로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일 거라 확신했다. 오뚜기 케첩 맛 잔뜩 나는 그 평범한 오므라이스가 뭐가 그렇게 맛있었을까? 평소 밥을 잘 안 먹던 나도 그날만큼은 한 그릇을 싹 비웠다. 


 ‘아빠’ 하면 자전거가 떠오른다.

아빠는 자전거 앞에 유아용 좌석을 설치해 날 태우고, 뒷자리에는 언니를 싣고 삼십여분을 달려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다 보면 수천 마리의 하루살이가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들어왔다. 한참 달리다 중앙공원 초입에 도착하면 꽤 어두컴컴한 터널이 나오는데, 언니와 난 그곳에서 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계속 맴도는 그 소리를 무서워하면서도 재밌어했다.


 ‘아빠’ 하면 철쭉이 떠오른다.

언니는 열 살 때 학교 과학 자유탐구 과제로 “진달래와 철쭉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조사했다. 그래서 우린 매주 탄천길을 따라 율동공원에 가며 철쭉을 관찰했다. 아마 언니반에서 우리 언니가 가장 성실히 과학 자유탐구에 임했을 거다. 아빠의 손을 잡고 겨우 건너던 돌다리를 혼자서도 잘 건너게 된 지금, 탄천에 핀 철쭉과 개나리에 감탄하던, 무릎을 꿇고 잠시 앉아 돌 틈에 핀 제비꽃을 보던 그때의 아빠가 선명하다. 


‘아빠’ 하면 인라인 스케이트가 떠오른다.

아빠는 언니와 내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가르쳤다. 우리 아빠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참 잘 탔다. 난 아빠들은 원래 스케이트를 잘 타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해 버벅거리는 어른 아빠의 모습을 어린 난 상상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야 언니와 난 아빠의 비밀을 알게 됐다. 아빠는 점점 커가는 딸들과 어떻게 하면 눈높이에 맞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인라인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그는 퇴근 후 지하주차장에서 휘청거리고 넘어져가며 남몰래 인라인을 연습했다. 그렇게 고독한 연습을 거친 아빠는 언니와 내 앞에 아주 능숙하게 인라인을 타는 멋진 아빠로 나타났다. 


‘아빠’ 하면 어부바가 떠오른다.

어릴 적 나는 움직이는 걸 정말 싫어했고, 아빠는 어떻게든 나를 움직이게 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등산을 가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는 그 꾐에 넘어가 난 매주 불곡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다 숨이 차면 난 아빠에게 업혔고, 아빠 등에 업힌 내가 부러웠던 언니는 내 똥꼬를 마구 찔렀다.  난 아빠가 업어주는 게 좋았다. 어릴 적 장시간 차 탈 일이 생기면 난 집에 도착하기 몇 분 전쯤부터 자는 척을 했다. 대부분은 날 억지로 깨워 스스로 걸어가게 했지만, 가끔씩 짐이 적은 날은 아빠가 날 업어줬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늦게 실기 수업이 끝나고 녹초가 된 날은 아빠에게 업어달라 어리광을 피웠는데 지하주차장에서 날 업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아빠의 등은 그때도 든든했다. 


‘아빠’ 하면 생선구이가 생각난다. 

아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생선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주었다. 스스로 생선을 바를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도 아빠는 내게 생선을 발라준다. 난 혼자서도 생선을 잘 먹을 수 있지만 아빠가 해주는 그 정성이 좋아 날름날름 맛있게 받아먹는다.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적어진 고모와 큰아빠 그리고 우리 아빠는 가끔씩 밥상에서 자식들에게 생선을 발라주던 자신들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렇듯 세월이 지나도 더욱 깊어지는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래도록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덮이지 않는 상처의 깊이도 있다. 아빠는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지만, 평생토록 그녀에게 자신의 속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다. 아빠와 그의 엄마 사이엔 좁히지 못한 거리가 있었고, 그 공백을 언니와 나, 그리고 우리 엄마가 메우며 우린 그렇게 이십여 년을 함께 살았다. 


 아빠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의 좋은 기억은 우리에게 그대로 남기고, 자신의 상처는 혼자서만 짊어지려 부단히 애를 썼다. 자신과 어린 딸들 사이의 기억이 그들의 남은 세월을 지탱할 수 있도록. 아빠는 그렇게 딸에게 시간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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