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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현이 Jul 13. 2023

도둑 같은, 도둑 같이 장례식

 할머니의 죽음은 급작스러웠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장염을 앓았다. 아직 할머니의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을 때 사촌 언니 한 명이 할머니를 뵈러 순천에 내려갔다. 죽만 먹어야 하는데 죽을 싫어하던 할머니는 손녀가 사 온 붕어빵 과자를 먹고, 평소 좋아하던 비피더스를 두 병이나 마셨다고 한다. 그러고 몇 시간 후 갑자기 온몸의 마비 증세가 와 순천의료원에 입원했다. 검사결과 어떠한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고 의사의 소견은 노인의 ‘꾀병’이었다. 

 순천의료원에 입원한 첫날 할머니는 극심한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잠을 못 이뤘다. 누워만 있던 할머니는 폐렴이 왔고 코로나 상황상 음압병동으로 이동해야 했다. 다행히 전남대학병원에 음압 병동 빈자리가 있어 그곳에 입원했다. 먼저는 고모네, 그리고 우리 가족, 마지막으론 울진에서 군생활을 하는 막내손자까지. 병원 측의 원칙을 깬 배려로 가족들 한 사람씩 병실에 들어가 죽음을 앞둔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렇게 내가 8개월 만에 마주한 할머니는 마르고 병든, 쓰러져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몸이었다. 

 이십 년간 나와 함께 산, 나의 주 양육자였던 할머니가 한순간에 부재하는 존재가 됐다. 지켜보지 못했던 마지막 호흡에 주름이 지고 차갑게 식어갈 몸을 떠올려 본다. 어떤 사람은 호상이라 했다. 어떤 사람은 분당에서 잘 살던 노인을 자식들이 억지로 내려보내 죽였다고 했다. 어떤 이는 할머니의 삶이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어떤 이는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편히 떠난 할머니의 죽음을 부러워했다. 할머니의 삶과 죽음에 대한 평가는 타인의 입을 통해 지속됐다. 순심의 장례식장에서 타인의 입에 의해 쉽게 내뱉어진 그녀의 삶과 죽음은 극단적이었다. 

 할머니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도 미친 듯이 밭에 나가 일을 했다. 고모는 이렇게 허망하게 갈 거면서 왜 그렇게 일을 해댔냐며 할머니를 책망했다. 할머니의 손아래 시누이, 대밭집 할머니는 말했다. 젊은 시절 큰아빠가 할머니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어린 자식 셋에 할머니 없인 농사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그 시절 도와주지 않고 분당으로 올라온 게 미안해서. 그래서 그렇게 늙은 몸을 이끌고 새벽같이 밭에 나가 미친 사람처럼 일에 몰두했다고.  큰아빠의 친구는 할머니의 삶을 두고 서순심 여사는 불꽃같이 살다 불꽃처럼 가셨다며. 할머니의 죽음을 그녀의 삶으로써 위로했다. 

 내가 가깝게 여기는 가족의 두 번째 죽음이었다. 처음은 엄마의 막내고모, 나의 고모할머니였고, 그다음에  순심이었다. 

 나의 엄마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였고 이후 엄마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기에 친조부모님 집에서 네 명의 고모들과 두 명의 삼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 고모들 중 막내 고모는 엄마와 나이터울이 가장 적었기에 엄마와 친언니와 같은 친밀함으로 함께 했다. 외할머니와의 왕래가 잦지 않았던 내게, 막내고모할머니는 ‘외할머니’와 같은 애정을 주고받는 그런 사이였다. 


 고모할머니는 오랜 기간 신장투석을 해오셨다. 몸의 일부가 제 기능을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장기와 근육 뼈까지 그 여파가 퍼져갔고, 그녀의 몸은 천천히 길게 약해져 갔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이미 약해진 다리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는데, 그로 인한 수술을 받다 그렇게 깨어나지 못하셨다. 

 예고 없는 죽음이었다. 나은 삶을 위한 살기 위한 의료행위가 곧 그녀의 죽음이 되었다. 


 처음의 장례식 에선 내가 슬퍼해도 될까? 하는 자기 검열에 의한 먹먹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납골당에서 고모할머니의 유골이 담긴 함을 만지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라는 장례지도사분의 말씀에 우리 엄만 엉엉 울며 자신의 고모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나도 내가 애정했던 그녀에게 “할머니 감사했어요.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편히 쉬세요. “ 라며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입술이 무겁게 말을 짓눌렀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가까운 촌수도 아닌데 내가 그 엄중한 자리에서, 다른 이의 시간을 뺏고 말을 해도 될까. 

슬픔에도 자격이 있는 것만 같았다. 


 반면 할머니 순심의 장례식에선 난, 무려 직계 손녀이자 이십 년간 함께 산 나는, 당연히 슬퍼할 수 있는, 슬픔을 당당히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는 어떠한 검증도 요구되지 않았고 이는 내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수많은 화환이 빈소 앞을 가득 찼다. 이전에 다른 분의 장례식을 갔을 때 상주가 화환을 찍는 걸 보고, 저걸 굳이 왜 찍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막상 내 가족이 상을 당하니 그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화환을 보낸 이에게 그것이 잘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전엔 굳이 왜, 그 기이한 형태의 거대한 화환을 보내나 다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상을 당해보니 온기 없는 그 화환조차, 그 부피감이 공허한 공간을 채움과 더불어 허한 마음에 은은한 위로가 됨을 깨달았다. 화환이 공간을 채울수록 마치 할머니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은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장례식을 치르며 난 평소보다도 밥을 많이 먹었다. 보통 하루에 한 끼와 간식, 정도를 먹던 내가, 하루 세끼 밥상을 꼬박 먹고 중간중간 간식까지 먹으니 나중에 삼일장을 치르고 와 몸무게를 재 보니 사흘 만에 무려 삼 킬로가 늘어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도 끊임없이 먹었다. 과식보다 쉬지 않고 먹는 게 더 무섭다는데. 난 배고픔을 느낄 순간이 없도록 계속해서 먹었다. 언니들과 모여 영화를 보며 야식을 먹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순심을 잃은 상실을 위장의 충만함으로 희석시켰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슬픔과 눈물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없음과 바쁨, 반가움과 고마움, 과식과 수면부족으로 슬픔을 느낄 새를 없게 하는 장이었다. 


 가족들은 순천 큰집이나, 인근 호텔을 잡아 잠을 청했고, 큰아빠와 아빠, 고모, 그리고 고모부는 장례기간 중 식장에서 잠을 주무셨다. 평소에도 불면증을 앓던 고모는 잦은 눈물바람과 불편한 잠자리로 두통을 호소했다. 다른 이들도 다를 바 없었는데, 어머니를 잃은 상실과 그걸 덮어버리려는 무수히 많은 대화들, 정신없음으로 피로해진 그 넷은 장례 마지막날 기진맥진하여 텅 빈 식장에 누웠다. 

 깊은 새벽 선잠을 자던 고모가 바스락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떤 남성이 신발을 신은 채 기어들어 와 고모 눈앞에 있는 거 아닌가. 고모는 제 사촌 동생인가 싶어. 


“누구니? 승기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화들짝 놀라 

“어 제가 술에 취해” 어쩌고 하며 혀와 몸을 꼬불거리며 잽싸게 뛰쳐나갔다. 


그 순간 바닥에 누워있던 큰아빠가 인기척에 본능적으로 확! 일어나 맨발로 그를 쫓아나갔다. 


큰아빠가 나간 지 한참 돼도 안 들어오자, 고모는 그 와중에도 자던 아빠를 깨웠다. 


“얘, 영기가 나가서 안 들어오는데, 나가봐야 하지 않겠니?”


고모와 아빠, 윤남과 충기. 둘은 그렇게 일어나 꿈뻑이며 큰아빠, 영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큰아빠가 터덜터덜 들어왔다.

한참을 뛰어가 잡고 보니 술에 취해 잘 못 들어온 사람이었다고 했다. 


순진한 삼 남매는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도둑이었고 큰아빠 상주복 주머니에 있던 부의금을 몽땅 들고 튄 거다!


그렇게 순심의 삼 남매는 눈앞에서 도둑을 잡고 안녕히 보내주었다. 


고모는 멍하니 앉아 45도 각도로 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있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할 순에 마음 심.

순한 마음을 가졌지만 호랑이 같고 사납던 고모의 엄마가 제게 말을 건네는 거 같았다.


‘거 봐라. 니들 나 없으니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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