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엄마의 기나긴 항암도, 나의 졸업전시도 끝났다.
엄마의 암세포가 줄어들어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수술 후 요양원에 들어가 혼자의 시간을 보내며 회복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일년간 버텼지만, 포기했고 순천 큰아들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가 분당에서의 모든 짐을 큰아빠의 화물차에 싣고 순천으로 내려가는날. 가족들이 우리집에 모였다.
고모네, 큰아빠네, 우리가족 그리고 할머니. 고모의 진행 하에 가족들 다함께 모여 평소 할머니가 좋아하던 찬양을 같이 부르고 각자 돌아가며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고모의 아들, 인규는 왜 마지막도 아닌데 분위기를 이렇게 조성하냐며 못마땅해 했다.
마지못해 할머니에게 말을 건네는 인규의 목소리는 눈물 때문에 반절만 나왔다. 인규는 어린시절 할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했다. 인규가 네살때 자신의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쫓아와 팬티만 입고 아파트 복도로 막 도망쳤는데, 할머니가 딱 나타나 구해줬다고 했다. 나의 아빠는 오십이 넘어서도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살 수 있었음에 자기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 자신을 제외한 모든이 들이 서로가 할머니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귀가 좋지 않은 순심은 자식 손주들이 하는 그 말이 안 들리는지 자꾸만 밥은 언제 먹냐며 보채었다. 마지막 차례였던 난 있는 힘껏 할머니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할머니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확실히 할머니는 나의 짧고 큰, 선명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우린 알았다. 할머니는 큰아들의 집에서 살다 생을 마칠거란 걸. 그리고 그게 순리대로 가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십년간 할머니가 채워왔던 자리의 공백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항암치료와 수술을 마친 엄마는, 수술의 예후가 좋지 않아 표적 치료를 받게 됐다. 다행히 표적 항암은 이전의 치료보다 훨씬 몸을 망가뜨리지 않았고 엄마는 점차 나의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을 다시 띄게 되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었다. 각자의 삶은 점차 엄마가 아프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할머니와 살며 누리지 못했던 것을 더욱 누리며 감사하자는 보상심리도 있었다. 주말엔 적당히 빵으로 브런치, 외식메뉴 자유롭게 정하기, 여행가서 일찍 돌아오지 않기.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데, 그게 그리 달콤했고 이전에 우리가 엄청난 희생을 한 양 우스운 마음조차 들었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칠십대 노인에게 그림을 가르치게 됐는데, 그림을 그리며 보면 조곤조곤 꽤 많은 얘기를 나눠주셨다. 그 어르신은 당신의 딸을 도와 낮시간 동안에는 딸 집에서 어린 손녀딸 둘을 돌보고 계셨다. 딸과 아들, 사위와 며느리, 그들의 속사정까지 이래저래 털어 놓다보니 자연스레 내 얘길 꺼내야 할 차례가 왔다.
그 어르신은 현재 우리 가정의 이야기를 듣더니 혀를 끌끌 차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식 키울땐 도와달라 부모를 불러 놓고, 제 자식들이 다 커 늙은 부모가 쓸모가 없어지면 다시 혼자살라 한다며, 그런 인생이 참 불쌍하다 말하는 그 얼굴엔, 이는 자신과는 매우 별개의 이야기며, 자신은 그리 되지 않을 것이란 무언의 당당함이 묻어있었다.
순천에 내려간 할머니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난 다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다는게 더 정직할지 모른다. 그저 가끔 전해오는 사진을 보며 할머니가 잘 지내고 있다는, 이것이 최선 이었다는 자기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다. 더욱 심해지는 팬더믹 속에 우린 혹여 피해를 줄까 봐 순천에 내려가지 못했다. 아니 이 또한 변명이었을지 모른다. 나의 통화목록엔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로 가득했다. 수신한 전화보다 이래저래 일에 치여 받지 못한 전화가 훨씬 많았다. 난 할머니에게 전화를 자주 걸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고모에게 언니들에게 왜 소현이처럼 전화를 자주 안거냐며 타박했다고 한다. 지금 와 생각하면 다시 내려간 순천에서의 순심은 총명했던 이전의 순심이 아니었다.
그렇게 순천에 내려간 할머니는 2021년 8월13일, 소천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