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때였나. 문득 궁금해졌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중 무엇이 더 클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나를 더 사랑해, 아빠를 더 사랑해?”
엄마는 말했다.
“둘 다 사랑하지”
재차 물었다.
“아니 둘 다 사랑하는 건 아는데, 누굴 더 사랑하냐고”
내 기억에 엄마는 나를 너무 사랑하지만 아빠를 더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닌, 자식에 대한 사랑과 부부간의 사랑 중 무엇이 더 큰지 궁금했던 거기에 상처가 되진 않았다.
엄마의 유방암을 우리에게 처음 밝히던 저녁을 기억한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언제부턴가 많이 피곤해했는데, 크게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고, 무언가 염려하는 듯했지만 자식에게 티 날 정도는 아니었다. 내게 엄마는 항상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엄마의 병은 더 슬펐다. 이상증세를 느끼고, 홀로 검사를 하며 숨 죽였을 엄마가 가여웠다.
아빠는 엄마의 상태를 우리에게 전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작 당사자인 엄마는 안 우는데, 아빠는 쏟아지는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 엄마 없는 삶은 상상이 안된다며. 언니와 나에겐 미안하지만 자신은 아비로서 역할은 다 했기에 엄마가 없이 남겨질 시간이 너무 길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며. 엄마가 죽으면 자긴 살 수 없다 말했다.
어떻게 내가 아닌 남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난 아직도 그게 궁금하다.
엄마가 아프고, 주변 사람들은 자주 내게 엄마를 돌보느라 내가 힘들겠다며 응원의 말들을 건넸다. 그러나 난 엄마의 병간호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다. 엄마를 돌보는 건 아빠의 몫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 절차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아빠는 누구보다 성실히, 지극정성으로 엄마 곁을 지켰고, 언니와 나는 덕분에 아픈 엄마를 둔 딸에게 기대되는 돌봄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빠는 매일 네시에 퇴근해 온종일 안방에만 있던 엄마를 차에 태워 동네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공원으로 향했다. 항암치료가 한창이던 당시 엄마는 한 발을 떼는 것도 힘들었기에 자가용 없이는 외출이 불가했다. 공원에서 아빠는 엄마와 매일 천보 걷기를 했다. 엄마는 백보를 걷고 한참 쉬고. 또 백보를 걷고 한참 쉬었다. 그렇게 천천히 매일 천보를 채웠다.
엄마가 항암을 하던 당시, 난 졸업전시 준비를 핑계로 대학 인근에서 자취를 했다. 막상 방을 구하고 나니 코로나가 터져 결국 모든 수업이 대면으로 이뤄졌지만. 여하튼 난 그 자취방의 존재에 안도감을 느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집에 가면, 내가 아는 나의 엄마가 사라진 그 집이 견디기 힘든 그리움을 안겨주었기에 도망치듯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내가 거리를 두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왠지 모를 미안함이 솟구칠 때면, 내가 내 할 일을 잘하는 게 곧 그녀를 위한 거라는 합리화로 무마했다. 엄마의 정확한 상태가 어떠한지, 언제 치료를 받으러 가는지, 검사는 언제인지.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가끔 가족 톡방에서 공유되는 사항만으로 그녀의 고통을 흐릿하게 유추할 뿐이었다. 당시 엄마의 상황은 아빠만 오롯이 알았다. 아마 많이 아는 만큼 아빠는 누구보다 더 큰 염려와 고통을 감당했을 테다.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자식도 부모를 사랑한다. (아기를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절실히 엄마를 갈망하는지 알 것이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엄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한결같이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보다 가볍다. 선택이 없으니 책임도 없다. 자신이 낳기로 선택한, 결혼하기로 선택한 그 선택엔 사랑보다 무거운 책임이 뒷따른다. 그리고 그 무게를 감내한다 묵묵히 오래토록. 느린 사랑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