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계절이 포개지는 시간

묵직한 겨울의 외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by 안명심

​시간은 결코 한 방향으로 곧게 흐르지 않는다.

마치 얇은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

떠나는 계절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가오는 계절의 무채색이 그 위를 덮는다.

아직 매달려 있는 붉은 잎사귀 위로 차가운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듯한 풍경.

지금 이 순간, 세상은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고 있다.

우리는 그 포개어진 시간의 틈을 묵묵히 통과하는 중이다.

​이 틈새에서는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면서도 동시에 모호하다.

볕이 드는 양지는 눈부신 가을이지만,

그늘로 한 발만 들어서면 피부를 에는 겨울의 입김이 서려 있다.

흙먼지 날리던 건조함 대신,



축축한 낙엽 냄새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쇠 냄새가 섞여든다.


발밑에서는 바스락거리는 마지막 저항이 들리다가도, 어느새 모든 소리를 빨아들인 듯한 묵직한 침묵이 거리를 지배한다.



​사람들의 옷차림조차 그 경계를 닮았다.

얇은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우면서도,

두꺼운 목도리를 겹겹이 두른다.

우리는 이 애매함 속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어느 한쪽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두 계절의 문지방을 동시에 밟고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는 유독 기억을 세차게 흔든다.

가을의 미련과 겨울의 냉철함이 교차하는 이 시간은, 삶의 다른 환절기들을 강제로 소환한다.

뜨거웠던 열망이 서서히 식어가고, 대신 차분한 수용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순간들.

어른도 아이도 아니었던 그 시절의 불안처럼,

우리는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것과 이미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한마음 안에 아슬아슬하게 공존시킨다.



​우리는 이 겹침을,

이 모호함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겪어내는 중이다. 묵직한 겨울의 외투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그 묵직함은 단순히 다가올 추위의 무게만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온 가을이 땀 흘려 남긴 열매의 무게이고,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밀도이며,

다가올 긴 침묵을 넉넉히 감당해낼 내면의 힘이다.


​두 계절이 포개지는 이 시간은 혼돈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치열하고 가장 농밀한 준비의 시간이다. 붉은 잎은 그저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봄을 위한 거름이 될 채비를 한다.

세상이 그 묵직한 외투를 단단히 여며 입듯,

우리도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옷을 여민다.

경계는 그렇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넘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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