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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Jul 17. 2024

내가 '이 사람과'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영화 <다운사이징>

[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신랑 000군은 신부 000양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어떤 상황에든지 사람만을 사랑하고 끝까지 함께 것을 맹세합니까?"


결혼식장에서 보통의 신랑 신부는 이러한 물음에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한다. 대답 못할 거였으면 애초에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 변치 않을 굳건한 맹세를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차차 느끼게 된다. 거기서부터 진짜 결혼 생활이 펼쳐진다.


영화 <다운사이징>에서 주인공 '폴'과 아내 '오드리'는 더 넓은 집과 여러 가지 경제적인 여유를 위해 다운사이징 시술을 선택한다. 몸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재산의 가치는 그만큼 더 늘어나서 평소에 누릴 수 없는 럭셔리한 호화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은 같이 상담도 받고 주변인들과 송별회도 하고 더 이상 필요 없어질 자신들의 물건들을 중고로 내놓았다. 충동적인 일이 아닌 충분한 시간과 의사소통을 통해 결정된 일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주인공 '폴'이 다운사이징 시술을 마친 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끝내 아내 '오드리'는 자신은 가족과 친구들을 두고 도저히 다운사이징을 할 수 없다며 포기하고 둘은 갈라선다. 다운사이징을 하기로 했던 건 너 때문이고 너를 위해 결정했다, 네가 좋아하길래 하기로 한 거다 라며 서로에게 원인을 돌린다. 신랑과 그 장면에서 동시에 탄식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 여보, 실패해도 지금이 딱 좋아


신랑은 한 회사에서 꾸준히 근속했고 주어진 일에 늘 진심으로 한결같이 성실하게 책임을 다했다. 감사하게도 업무 성과를 인정받아 본인도 성취감을 느끼며 꾸준히 성장했지만, 언젠가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회사 생활에 늘 긴장감과 압박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옆에서 볼 때 그가 참고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신체적 선을 확실히 넘어선 게 느껴졌다. 본인과 처자식을 포함한 5인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외벌이로 버텨야 했을 가장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을 거다.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못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집에 오면 애 셋 보느라 더 피곤해 보이는 아내가 있으니 차마 티 내기도 민망했을 터라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당신은 회사를 그만두고 쉼이 필요한 때라고.


"우리도 젊고 아이들도 젊으니까 내가 그만두라고 하는 거야. 오히려 애들이 더 큰 중고등학생이었으면 돈 들어갈 일도 많아서 이렇게 쉽게 말 못 해. 우리도 애들도 젊으니까 지금이 딱 좋아. 만약에 실패해도 버틸만할 거야. 둘이 경차 타고 택배일을 하든 떡볶이집을 하든 뭐라도 하자. 다 안되면 이 집 팔고 다시 전세로 가도 돼. 우리 둘이서 해보자."


후에 신랑은 나의 그 말이 꽤 든든했다고 한다. 신랑은 퇴사 후 쉬면서 심신을 재정비했고 지금은 개인 사업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아 가장의 무게를 즐겁게 이어가고 있다. 



# 내가 '이 사람과'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영화 <다운사이징> 속 설정과 현실의 삶을 뒤섞어 생각해 봤다.

내가 이 사람과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바퀴벌레 나오는 집도 버틸까.

아파트가 아니라 다시 곰팡이 피는 빌라에서의 생활은 가능할까.

아이들이 치킨 먹고 싶다고 말할 때 바로 사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괜찮을까.

배우고 싶은 학원도 가지 못하고 오히려 다니던 곳도 끊어야 할 형편이 되면 어떨까.

신랑이 정말 백수가 돼서 수입이 없고 내가 돈을 벌기 위해 갑자기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눈썹 밀고 머리 밀고 온몸의 털을 다 밀고 쪼그라들어 소인이 되는 다운사이징 시술까지도 할 수 있을까.

내 친구와 가족을 모두 떠나 이 사람과만 단둘이서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인생을 선택한다고 해도 내 마음은 후회와 변함이 없을까.


신랑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하면서 내가 했던 말은 입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다. 아마도 그게 내가 지금 신랑이 퇴사한 후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이 사람과 여기까지 있다'라고 생각했던 지점이었던 같다. 어떤 선택이든 어떤 상황이든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되더라도 우리 둘이 함께라면 상황에 맞게 살아낼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온몸의 털을 다 밀고 소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둘이서 시작한다면 괜찮겠다 싶었다.



# 거실에 세탁기 있던 신혼집에서부터 쌓아온 전우애


우리의 첫 서울 신혼집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빌라 5층 맨 꼭대기집 투룸 전세였다. 말이 투룸이지 집이 워낙 작아서 방 1개는 쓸 수가 없었다. 작은방에 냉장고를 넣고 거실에 식탁과 세탁기, 안방에 침대, 옷장, 서랍장을 두니 집이 꽉 찼다. 현관문을 열면 보이는 공간이 주방이자 거실이자 다이닝룸이었고 여건상 세탁기도 거실에 같이 둬야 했다. 혹시나 해서 비슷한 보증금의 다른 집들을 찾았지만 지역에서는 집이 가장 최선이었다. 


그래도 그 신혼집에서 둘이 에피소드 넘치게 재밌게 살았다. 빌라 주차장은 이중주차를 해야 했는데 앞차가 연락이 안 되고 차를 뺄 수 없어서 신랑이 급히 버스를 타고 출근한 적도 많다.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후다닥 튀어올라가 걷기도 했다. 안방에 바퀴벌레가 날아들어와서 기겁하기도 했고 여름엔 에어컨 없이 너무 더워서 밤새 선풍기를 껐다 켰다 해야 했다. 와중에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서 집들이도 하고 소중한 첫 아이를 낳아 키웠다. 만기 시점에 전세금도 오르고 아이와 살기엔 너무 좁아서 떠나야 했지만 이삿날 눈물이 주르륵 나올 만큼 정이 많이 든 집이었다.


요새는 고급 호텔에서 명품으로 프러포즈를 받고 신축 아파트에서부터 신혼집을 시작한다는데 그에 비해 우리 부부의 시작은 참 초라해 보일 듯 소박했다. 그래도 그 상태로 시작해 둘이서 한 푼 두 푼 모으며 어느덧 결혼 10년 차를 살아보니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안 될 것도 없다 싶은 용기가 탄탄하게 다져졌다. 이젠 서로를 보며, 그리고 우리가 일궈온 지금의 가정을 보며 뿌듯하고 기특해하는 뜨거운 '전우애'가 생겼다. 더 좋은 신혼집에서 더 좋은 환경으로 걱정 없이 시작했다면 지금 느끼는 의리와 서로를 향한 애정이 좀 덜했을 수 있겠다 싶다. 그와 함께 했기에 크고 작은 여러 시련들도 이겨냈고 그 과정 속에서 같이 배우고 얻는 것들도 많았다. 여행의 즐거움은 '어딜' 가느냐 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내가 사람과 '어디까지' 있느냐보다, 어디든 '이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에 중점을 두면 답이 나온다. 




# 서로에게 녹란과 같은 존재가 되어주길


주인공 '폴'은 영화 중반부 '녹란'을 만나면서부터 인생의 그림이 달라진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어떻게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녹란은 폴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봤고 그에 대한 확신을 예의 없게 느껴질 만큼 단호하게 주장하며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런 녹란의 진심이 폴에게 닿았고 둘은 다운사이징된 레저랜드에서 지친 이웃의 삶들을 돌보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녹란이 폴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약한 편이었던 나에게 늘 초긍정의 언어로 높여줬고 격려했고 어떻게든 항상 좋은 면을 샅샅이 찾아 치켜세웠다. 처음엔 그런 칭찬이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점점 희미한 나를 붙잡아주고 나도 도전해 볼까 라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당신은 글을 쉽고 재밌게 써. 내가 말했잖아, 쓰는데 재능이 있다니까. 진짜야."라며 아주 정색하듯 말해주는 바람에(?) 이렇게 브런치 작가가 되어 연재 스토리북도 발행해 보게 됐다. 신랑을 만나기 전의 나는 꽤나 뾰족하고 까칠했는데 초긍정의 밝고 따뜻한 그를 통해 나의 모난 부분들이 많이 다듬어졌다. 서로가 달라서 맞추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래서 더 부부로서의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나도 신랑에게 녹란처럼 단호하게 명령조처럼 들릴만큼 그의 가능성과 가치에 대해 한 톨의 의심 없이 확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Dreamer인 그의 옆에서 Believer로 믿어주고 지지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길 원한다. 거실에 세탁기를 두고 살던 신혼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들끓는 전우애로 다져진 10년 차 부부의 내공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역시나 뚜벅뚜벅 '그와 함께' 가고자 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가자, 전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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