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를 낳고조리원에 입소한 뒤 원장 선생님과 간단한 오티를 했다. "어머 셋째 시구나. 잘 들으세요. 이제 향후 대략 10년간 이런 공식적인 휴가는 얻기 힘드니까 무조건 쉬세요. 모유수유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애기도 우리가 잘 볼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애기 엄마는 그냥 여기서 푹 쉬셔요. 빨리 누워 누워. 카톡도 하지 마 손목 나가. 그냥 먹고 쉬고 자는 게 최고야. 알았죠?"
이후로 쭉 조리원에서 나름 특별 대우를 받았다. 내가 허리가 좀 아프다고 했더니 신생아실 선생님들과 원장 선생님까지 총 출동해서 여기 셋째 엄마라고, 이 엄마 아프면 안 된다고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기는 우리가 잘 돌볼 테니 제발 그냥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다들 강력하게 얘기했다. 그렇게 강압적인 휴식 처방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눈물 나게 고마웠다.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볼 수 있겠나 싶었다.
영화 <극한직업>의 개봉일은 2019년 1월 23일. 우리 막내가 19년 8월생인데 아마 내 기억으로 이 영화는 막내를 낳고 조리원에서 신랑이랑 봤던 것 같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심심하면 티비 보던 조리원 천국 시절. 뭔가 심오한 영화보다 그냥 생각 없이 즐기는 단순하고 웃긴 한국영화를 보고 싶었다. 앞으로 펼쳐질 세 아이 육아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을 잊고 싶었나 보다. 지금 다시 봐도 박장대소할 장면들이 넘쳐난다.
# 여보~ 그게 무슨 말이야? 씻다니? 왜?
영화 <극한직업> 속 주인공인 고반장(류승룡)이 평소에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고 승진도 미끄러지는 마약반 형사 반장이었지만, 위장 창업을 통해 시작한 치킨 장사가 대박이 나면서 아내에게 명품 구찌 가방과 그 안에 수많은 현금다발까지 챙겨 갖다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큰 감동을 받은 아내는 빨리 씻고 오겠다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욕실로 뛰어들어갔고 고반장은 왜 그러냐며 지퍼를 올려 잠그면서 당황한다. 이미 온라인상에서 '의무방어전'으로 너무나 유명한 짤이다.
내가 아이 셋이라고 하면 지인이나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우리 중에 제일 야하다고 놀린다. 신랑이랑 최소 세 번이나 한 거 아니냐며 응큼하다고 놀려대고 나도 얼떨결에 수긍한다. 신혼 때 부부관계를 가질 때마다 커다란 항아리에 구슬을 하나씩 넣고 나서 나중에는 반대로 할 때마다 한 개씩 구슬을 빼면 평생을 가도 모든 구슬을 못 뺀다는 웃픈 예화도 들었다.
결혼생활을 이어갈수록 부부관계 횟수가 희미해질 가능성이 높긴 하다. 체력적으로 20대에서 30대, 40대로 점차 늙어가게 되니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는 오히려 여자에게 남성호르몬이,남자에게는 여성호르몬이 높아져서 성적인 욕구 또한 반대가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며 엄마가 기본적으로 더 씩씩해지고 아빠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일들이 잦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처럼남녀의 성욕도 점차 반비례 곡선을 그린다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부부관계에서도'여보 씻다니?'의 상황처럼 신랑보다 내가 적극적일 상황이 점차 많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도 잘 이해되지 않는 말 중에 하나가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라는 말이다. 흔히 부부관계에 대해 한쪽이 방어할 때 그런 말을 하는데 가족끼리 그러지 않으면 대체 누구랑 그래야 한다는 걸까? 역설적으로 가족이라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결혼한 후에 유일하게 특별히 공식적으로 부부에게만 허락되고, 임신이라는 엄청난 축복의 결과까지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부부관계인데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은 좀 너무하다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면서 주양육자인 엄마의 역할에 충실해졌을 때는정말부부관계에 쏟을 에너지와 정신이 없었다. 육아를 하며 나를 갈아 넣는다는 무시무시한 표현을 쓸 정도로 먹고 자고 싸고 씻는 인간의 기본 욕구들조차 해소하기 어려운 상태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쪽이 뜨거운 핑크빛 사인을 보내더라도 너무 피곤해서 잠들어버리거나 일부러 모른 척할 정도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커지기도 한다.
나도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2년 터울로 내리 세 아이를 키우면서 한참 모유수유와 육아, 각종 집안일을 해내야만 하는 시기라 부부관계는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가끔은 이걸 굳이 해야 하나 싶을 만큼 별로 흥이 오르지 않고 그냥 더 자고 싶고 더 쉬고 싶었다. 늘 잠이 부족해서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훨씬 안락하고 쾌적하고 절실했다. 그 시기에는 신랑도 나도 각자 일과 육아로 가장 치열했을 때라 서로 의무방어전을 치렀을지 모르겠다.
#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 부부는 가끔 한 번씩 '5가지 사랑의 언어' 테스트를 해본다. 결과가 늘 같지 않고 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왔는데 특히 내 테스트 결과가 변해가는 게 재밌다. 처음에 제일 비중이 컸던 사랑의 언어는 '함께 하는 시간'이었는데 그다음에는 '봉사'로 바뀌었다. 연애할때나 신혼 초에는 신랑이 너무 바쁘고 도통 집에 없으니 옆에 있기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제 아이들이 태어나고 집안일이 많아져서 신랑이 그냥 옆에 있는 것보다 빨래도 개서 넣어주고 애들도 씻겨주고 분리수거도 정리하는 봉사를 해줄 때야 '아, 이 사람이 나를 진짜 사랑하는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신랑의 사랑의 언어는 한결같이 늘 '육체적인 접촉(스킨십)'이 1순위다. 남자라서 나온 흔한 결과구나 싶었는데 그의 입장을 들어보니, 결혼 후 부부관계를 포함한 스킨십은 부부에게 한정돼 있어 서로에게만 할 수 있는 정말 특별한 사랑의 언어이기 때문이고 특히나 남자인 본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히 1번 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선물이나 봉사, 시간 등등은 친구나 지인이 대신해줄 수도 있겠지만 스킨십만큼은 부부 사이에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말에 큰 공감이 갔다. 그의 다음 순위는 '인정하는 말'이었다. 아내에게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말을 듣는 게 다른 누구에게 받는 찬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좋다고 했다. 내가 소소하게 했던 작은 칭찬들에도 진심으로 많이 좋아했던 모습들을 떠올려보니 더 잘 이해가 됐다.
이후로 신랑은 나에게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봉사를 해주며 사랑을 표현한다. 나도 그의 스킨십을 깊이 애정하고 같이 즐겁게 호응한다.물론 인정하는 말도 챙겨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의무방어전
단순히 각자 사랑의 언어 순위를 매기는 것보단 그 결과를 가지고 서로를 알게 되는 풍성한 대화가 오갔다는 점이 값지다.자기가 어떤걸 좋아하는지 솔직히 말해줘야 상대방도 알 수 있다. 난 신랑과 손 잡는 걸 좋아하고 가끔 신랑이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주는 게 좋다. 대신 장난처럼 머리를 흩트려 뜨린다거나 볼을 무자비하게 부여잡는 건 질색이다. 포옹하다가 옆구리살과 뱃살을 찾아 일부러 두툼하게 두께를 잡아 흔드는 건 진짜 최악이다. 그런 소소한 스킨십의 선호도부터 시작해서 아주 낯부끄럽지만 부부관계에 대한 느낌과 상황, 표현 등등 진솔한 대화까지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고본다. 부부라서 조심스럽지만 부부라서 할 수 있는 얘기와 주제다.
10년여의 결혼생활동안 신랑과는 무조건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걸 고집스럽게 고수했다. 그가아무리 코를 심하게 골아도, 내가 밤중수유를 한다고 수시로 깨고 부스럭거려도 우린 늘 붙어서 잤다.편하고 합리적인 것을 찾았다면 진즉 각방을 쓰며 결혼 전처럼 홀가분하게 살았을 거다. 엄밀히 말하자면부부는 서로 피가 섞이지 않은 쌩판 남이기 때문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된다'던 옛 유행가 가사처럼 한 끗 차이로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릴 수 있다.그래서 더 죽을 때까지 가장 관심을 기울여서 세심하게 관리하고 그 어떤 관계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평생 가꿔가야 할 인간관계가 바로 부부다.
나는 딱히 하고 싶지 않지만 상대방에게 맞춰준다는 식의 의무방어전은 그 단어 자체로 참 씁쓸하다. 한참 불타오르던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부부관계마저 해야만 되는 일처럼 의무적으로 한다니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의 의무방어전은 필요하다. 의무방어전이 아닌 서로가 원해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몸의 대화가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의무방어전을 통해서라도 대화의 노력을 놓치면 안 된다고 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왜 의무방어전으로 여기는 마음이 드는지 서로 진솔하고 깊이 있는대화를쌓아가는 시간을 많이 가지길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영화 속 고반장 부부가 사랑의 언어 테스트를 했다면 아마 선물과 스킨십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냥 결혼하면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하며 무작정 넘기지 말고, 그게 무슨 말이야 씻다니 하고 반문하며 지퍼만 올려 잠그지 말고. 부부관계에 대해 한쪽은 원하고 한쪽은 불편해한다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상대가 어떤 사랑의 언어를 원하는지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사랑의 표현을 단순히 5가지로 분류한다는 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최소한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사랑이 어떤 건지 이해하고 그 언어를 해석하려는 노력과 관심에서부터 가슴 뜨거워지는 사랑을 느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