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현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남친과 같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하며 함께 봤는데 평소 그렇게 눈물에 인색하던 그가 드디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걸 직관했다. 늘 내 인생 영화로 꼽히는 명작이라고 소개했는데 그때부턴 우리 부부의 인생 영화가 됐다. 하지만 맘이 아파서 한번 더 보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할 정도로 가슴 시린 이야기다.
영화 <노트북>에서 여러 인상 깊은 장면이 많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 부부가 손꼽는 장면은 마지막에 부부가 한날한시에 눈을 감는 장면이다. 영화 속 주인공 '앨리'는 '노아'와 수많은 역경과 시간 속에서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지만 노년에 치매로 고통받아 기억이 지워져만 간다.
요양원에서 매일 그녀의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그녀를 위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노아. 순간적으로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지만 이내 낯선 사람을 본 듯 소리치며 외면해 버리는 앨리를 보면서 노아는 크게 슬퍼하고 점차 그의 심장병마저 악화된다. 어느 날 밤 기억이 돌아온 앨리는 남편 노아를 단번에 알아보고 서로를 향한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며 한 침대에서 편안히 잠이 들었고 그렇게 둘은 세상을 떠났다.
치매가 정말슬픈 건 함께 했던 기억을 한쪽은 잊고 한쪽만 기억한다는 점이다.연애 7년과 결혼 10년을 합해 총 17년을 함께 해온 우리 부부의 17년 기억 중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여러 에피소드들과 추억이 서려있다. 누구에게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모를 우리만 알고 우리만 느끼는, "여보 우리 그때 있잖아~"하면 바로 알아듣는 그 둘만의 공통 기억이 사라진다는 게 너무나 비극이다.
# 부부가 한날한시에 떠나는 축복 또는 날벼락..
옛날부터 어르신들에겐 집에서 주무시듯 편안히 돌아가시는걸 제일 호상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앨리와 노아는 호상이었다. 집은 아니었지만 둘이서 함께 오랜만에 편히 잠들며 떠났으니 말이다. 다만 자녀들의 입장에선 부모님 두 분이 한 번에 돌아가신 게 되니 더 큰 슬픔일 수 있겠다 싶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한분도 아니고 두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데없이 고아가 됐으니 얼마나 날벼락같은 일이겠는가. 하지만 내가 만약 배우자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게 얼마나 버겁고 힘든 일일지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아빠는 거의 매일 엄마 수목장 나무에 찾아가 물을 주고 가꾸고 또 가꾸셨다. 수목장에 가시면 엄마 나무 옆에 앉아 여기 참 좋다고 공기도 좋고 조용하니 참 좋다고 하셨다. 먼저 가버린 엄마가 야속하다고 서운하다고 혼자 그리 떠났냐며 삐치기도 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엄마 잃은 슬픔이 크다 해도 아빠에 비하면 그저 초라할 뿐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4년이 넘었지만 아빠 휴대폰 배경화면은 아직 엄마의 셀카 사진이다. 아무리 자식들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크다해도 부모님께서 지난날 두 분이 버티고 살아온 세월 동안 쌓은 정과 사랑에 비할까.
그래서 신랑과도 얘기했다. 아이들에게는 비극이고 큰 슬픔일지 몰라도 가능하다면 난 우리 둘이서 재밌고 건강하게 살다가 한날한시에 가고 싶다고. 어느 누구도 홀로 남겨있지 않고 그냥 둘이 살다 둘이 가자고 말이다. 정말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 그땐 그랬지
우리 부부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건지 종종 추억에 잠겨 그땐 그랬지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가 많다. 애들 키우고 돈 벌고 살림하고 회사 다니고 정말 정신없이 살아내느라 바빴는데 이제 애들이 좀 크고 돌아볼 여유가 생겼는지 그땐 어쩜 그리 살았었나 싶게 서로를 대견해한다. 지금 첫째가 10살이니 10년 뒤면 20살, 20년 뒤면 30살이 된다. 그럼 그때쯤엔 우리가 몇 살인 건가 우리가 어떤 모습인가 그려본다. 그 모든 기억과 미래 속에 늘 우리 둘은 함께다. 17년이라면 꽤 긴 시간임에도 앞으로 함께 할 날에 비하면 작다.
둘이 프랑스 파리 가기, 오로라 직접 보기, 스카이 다이빙 해보기, 성지순례하기, 같은 작업실에 둘이 쓰는 책상 꾸미기, 운동 열심히 해서 탄탄한 몸매의 중년되기...
그때가 되면 또 지금을 떠올리며 맞아 우리 그때 그랬지 싶어서 추억에 잠길 것이다. 어찌 됐건 결국 아이들은 성장하고 독립하게 될 거고 남는 건 부부뿐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부부가 같은 날 같이 죽을 수 있는 축복이 우리에게 오길 바란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남겨진 이에게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도록 혼자서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시간들을 오늘도성실하게 소중히 채워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