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도드라지게 싸우는 편이 아니다. 둘 다 굳이 큰 소리 내는 걸 싫어한다. 딱히 서로 목소리가 격앙된다거나 큰 소리가 나는 경우가 적고 의견이 다를 때는 한쪽이 수용하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된다. 특히 신랑은 누가 봐도 초긍정의 미소남이기 때문에 우리가 싸운다기보다 그냥 내가 화를 냈다거나 혼자 속상한 일이 있었다 정도로 정리된다. 또 나도 불편한 걸 바로 파르르 얘기하진 않고 꽤 참다가 나중에야 말하는 편이라, 나의 서운한 점이나 화나는 부분을 대략 9천 번 정도 참다가 그에게 털어놓은 걸 알기에 듣게 되면 본인이 그 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며 바로 인정하고 즉시 사과한다. 서로 얼마큼 참았는지, 변명 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지 충분히 알기에 서로 싸움을 하려야 하기 어렵고 잘 안된다.
그런 우리 부부라도 첨부터 이랬던 건 아니고 신혼 초에 아무래도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었다. 30년 가까이 따로 살아온 성인들인데 하나로 맞춰가기까지 어그러지고 찔리고 상처투성이인 것이 당연했다. 다시 떠올려보면 시시콜콜 시답지 않은 일들이기도 하고 또 몇몇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나 싶게 이상한 사건들도 지나갔다. 그중에 가장 최악의 시점이 있었다.
# 사랑해서 결혼해도 외로울 수 있구나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둘째를 임신하고 있을 때였다. 첫째는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던 18개월 남짓 아이였고 난 입덧이 너무 심해 맨날 헤롱거리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신랑은 직장에서 점점 연차가 쌓이며 바쁘던 일들이 더더욱 심히 바빠져서 주중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 워크샵, 지방 출장, 집에서도 매일 노트북 작업을 밤새 하던 시기다. 서로 정말 마주칠 일이 적어지고 점점 대화할 짬조차 없었다. 대화라기보다 사실보고, 일정공지의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좀 말해볼까 싶더라도 너무 일에 바쁘고 치여보여 내 얘기를 꺼내기 어려웠고 그렇게 점점 벽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아 이래서 결혼해도 외롭다고 하는구나. 외로워서 이혼한다는 말이 이 뜻이구나.'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소중한 아이도 있는데 참 외로웠다. 서로 사랑하기에 결혼했지만 그럴수록 지독하게 외로워져 갔다.
# 제이슨과 알라나에게서 우리 모습을 보다
미드 <씰팀>은 우리 부부가 정말 애정하는 작품이다. 미국 CBS에서 방송되는 드라마로 미해군 소속 티어1 특수부대 데브그루의 한 팀인 브라보를 다루는 이야기다. 실제 밀리터리 액션 고증이 가장 잘 됐다고 손꼽힐 뿐만 아니라 각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스토리 전개를 굉장히 촘촘하게 쌓아가기 때문에 짜릿한 밀리터리 액션의 맛과 대본의 완성도면에서 극찬하지 않을 수 없다. 시즌1부터 시즌6까지 남은 에피소드가 적어질수록 아쉽고 소중히 여기며 신나게 챙겨 봤다. 이젠 앞으로 방영될 시즌7을 기다리고 있다.
극 중 주인공이자 메인 캐릭터인 제이슨은 브라보팀의 리더로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뇌하는 역을 잘 풀어갔다. 그는 아내 알라나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팀과 업무 또한 챙겨야 하기에 늘 가정의 일을 놓칠 수밖에 없었고 이 구멍을 알라나 혼자 메꾸며 아이들과 가족의 생계를 챙기고 감당하다가 관계의 균열이 생겨 결국 서로 시간을 갖기로 한다.
제이슨과 알라나의 관계를 보며 신랑과 나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가 하아.. 하며 깊은 한숨을 쉬며 영상에 몰입했다. 너무나 우리 모습 같아서 그랬다. 신랑은 제이슨을, 나는 알라나의 입장을 너무도 깊이 공감했다. 상대방의 상황도 선택도 모두 머리론 이해하지만 나 역시 홀로 감당하기 힘든 부분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상대에게 서운하고 외롭고 배신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 일과 사랑, 둘 다 잡으려다가 모두 망한다
일과 사랑 어떤 것이 먼저 일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까. 일도 잘하면서 가정도 잘 돌볼 수 있을까. 직장에서 뛰어난 책임자이면서 가정에서도 훌륭한 부모이자 배우자가 가능한 걸까. 성공한 워커홀릭이면서 자상하고 완벽한 남편일 수 있나. 일처리 잘하고 승승 장구하는 리더이면서 아이들도 살뜰히 챙기고 집안일도 잘 해내는 워킹맘이 과연 몇이나 되려나.
누군가 말했다. 둘 다 완벽하게 잘 해내려고 하면 둘 다 완벽하게 망쳐버릴 거라고. 나도 이 말에 공감한다.
어떤 한 곳이 잘 되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한쪽은 구멍이 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커리어를 선택해 일에 집중한다면 가정에 그만큼 소홀할 수밖에 없고 그 부분은 다른 배우자가 도맡아야 한다. 가정을 선택해 가족들과 집안일에 에너지를 쏟는다면 그만큼 일을 위해 집중하고 준비해야 할 시간을 놓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에 대한 승진 혹은 커리어 상승, 연봉 상승이나 이익 창출은 그만큼 가파르게 오르지 못함을 상대배우자도 감내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인지라 그 부족함에 괴로워하며 일도 가정도 잘 해내려다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뒤죽박죽 상황에 지쳐 쓰러지는 이가 많은 거다.
# 그래서 우리 부부의 결론은?
제이슨과 알라나처럼 갈등이 극에 달할 무렵 내가 솔직히 지금 우리 부부의 상태와 관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운을 띄웠고 때마침 일주일 일본 워크샵을 갔던 차에 서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고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냥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신랑은 외벌이로 일에 충실했고 본인이 맡은 직책에 최선을 다했다. 나도 엄마로 내가 할 일에 집중했고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노력했다. 신랑은 그런 자신의 바쁨과 힘듦을 알아줬으면, 나는 이런 나의 지침과 외로움을 알아줬으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일주일 고민해 보고 내린 결론은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거였다. 그는 직장에서 핵심 멤버이며 주요 팀장이자 센터장으로 30대에 열심히 실력을 쌓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나는 아이의 주양육자로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꾸려가야 할 상황이었다.
서로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임을 인지했고 달라진 건 반드시 같이 "대화"를 하자는 거였다. 그냥 상대가 어련히 알겠지,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 싶어서 미뤄 짐작하지 말고 이런 부분이 어렵다, 이런 부분은 같이 하면 좋겠다, 이런 부분은 좀 시간을 주면 좋겠다 등등의 조율과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에 매우 동의했다.
그 시기의 심각성을 알고 대화했기 때문에 지금 세 아이를 결실로 맺고 결혼 10년 차를 다행히(?) 잘 지나가고 있다고 본다. 그냥 다들 이러고 산다며 넘겼다면 아마 더 큰 균열과 파도가 우리 결혼 라이프를 흔들어댔을 것이다.
남편이 꼭 씰팀의 티어1 요원이 아니더라도 제이슨처럼 일터에서의 책임감과 리더로서의 고뇌와 업무의 스트레스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바쁜 남편만큼 그가 가정에 미처 쏟지 못하는 부분까지 아내가 모두 감당하여 가장 아닌 가장처럼 씩씩하게 리드해야만 하는 상황도 그만큼 많아진다.
각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음을 서로 인정해 주고 그 과정과 어려운 부분을 대화하며 공유한다면 제이슨과 알라나의 틈만큼 비극으로 벌어지지 않고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지나가리라 응원해주고 싶다. 그 외로움의 의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진심으로 감당하느라 느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외로움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부부가 서로 나누며 인정하는 시간을 가지길 강권하고, 한걸음 한걸음 뚜벅뚜벅 걸어간다면 어느 날 같이 어깨동무하며 뒤를 돌아볼 때 꽤나 잘 버티고 걸어왔음을 느끼며 서로를 기특해하고 대견해할 날이 올 거다. 그 외로움에 사로잡혀 파묻히지 말고 전사처럼 툭툭 털고 일어나 덤덤하게 인생의 길을 걸어가시길.. 그 고독하고 치열함이 담긴 레드카펫의 귀퉁이에서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