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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Aug 15. 2024

세 딸 중 멸망하는 지구에 막내만 남겨둬야 한다면

미드 <로스트 인 스페이스>

[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그렇게 셋째가 왔다

신혼 초 자녀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난 별 생각이 없었고 신랑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주시는 대로 낳아야죠."

우리 부부는  다 남매로 자랐고 성인 둘이 만나 결혼했으니 유전자 둘은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아이 2명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그래서 둘째 아이의 돌잔치가 우리에게는 마지막 돌잔치가 될 테니 친척들도 초대해서 나름 성대하게 치렀다. 이제 둘째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내년부터 등원시킬 곳에 지원을 해두고는  새해에 하고 싶은 일들 리스트를 야심하게 써 내려가며 어떤 걸 해볼까, 뭘 도전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었다.


그러다가 왠지 모를 이상한 감기 기운에 심상치 않은 촉이 발동해 설마 하는 마음에 해 본 테스트기에서 두줄을 봤다. 처음엔 정말 보면서도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다며 여러 번 현실을 부정했지만 테스트를 할 때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두줄을 보며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서프라이즈 선물로 내 인생에서 셋째를 만났다.


셋째는 복덩이였다.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가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시기에 막내의 애교를 보며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셋째로 인해 비로소 완전체 5인가족이 되면서 신혼부부 7년, 미성년 아이 3명이라는 다자녀 기준을 충족해 매우 좋은 조건의 대출금리로 생애 첫 1 주택을 안전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막내는 막내인지라 뭘 하든 그저 귀여운 녀석으로 흐뭇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주위에 기대치 않게 셋째가 생겼거나 셋째 계획을 고민하는 케이스가 있다면 주저 않고 복덩이가 오는 거라며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추천해 준다.



# 로빈슨 가족에게서 느껴지는 다자녀 가정 짬바

미국 SF 드라마 <로스트 인 스페이스>는 넷플릭스 드라마로 위험해진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 출발했다가 엉뚱한 곳에 불시착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위기와 모험을 겪게 되는 로빈슨 가족의 이야기다. 시즌 3까지 나올 만큼 흥미진진한 전개와 입체적인 인물들로 오랜만에 재밌게 봤던 미드였다.

특히 로빈슨 가족은 우리와 같은 5인 가족이라 간간히 느껴지는 다자녀 가정의 생활 모습에 공감도 가고 주인공 아이 셋을 각각 우리 아이들처럼 감정이입하게 되면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스토리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족 안에서의 회의 규칙이 있다던가, 엄마가 할 일 목록을 써둔다던가, 세 아이들이 각자 롤에 따라서 움직인다던가 하는 세세한 모습들을 보며 최소 5인 이상인 다자녀 가정이 갖는 특징들이 느껴져서 공감했다. 존, 모린, 주디, 페니, 윌 다섯 명에게 같은 다자녀 패밀리로 전해지는 동질감이 더해져서 매 에피소드마다 더욱 몰입하면서 드라마를 즐겼다.


매사 예민하고 맏이로서의 책임감이 강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첫째, 소심하지만 엉뚱하고 장난기와 호기심이 많아 결정적일 때 실행에 옮기는 둘째, 나 홀로 시간을 즐기며 자유롭게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 셋째까지. 우리 애들 모습과 닮은 구석들이 보일 때 신랑과 둘이 어쩜 이렇게 똑같냐며  맞장구를 치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개인 고유의 성격이 있듯이 각자의 성격과 기질도 있겠지만 '첫째이기에, 둘째라서, 막내니까'하며 형제자매관계 내에서 갖게 되는 포지션상의 특징들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게 우리 가족의 선택인 거야

작품 속 로빈슨 가족 내에서 막내 역할을 하는 윌은 막내라서 보호받지만 그러기에 더욱 자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내고 싶고 어려움을 혼자 감내하고자 하는 면이 있다. 로봇과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인물로 솔직하고 순수하면서 상황판단이 미숙해 잘 속는 어리숙함까지 겸비한 막내다운 모습이 재밌었다. 그래서 사실상 주인공 중의 주인공 격으로 그려진다.


로빈슨 가족은 5명 모두 개별 이주민 테스트를 거쳐 통과해야 이주민 프로젝트에 참여해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후반부에서 막내 윌은 위기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해 기존 테스트에서 사실  불합격했었다는 충격적인 과거가 나온다. 하지만 천체물리학박사였던 엄마 모린이 부정행위를 통해 윌을 합격자 명단에 올리고 가족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5명 모두 이주민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보다가 해당 장면에서 바로 정지버튼을 누르고 신랑에게 물었다. 솔직히 자기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할 거냐고. 그러자 0.5초 만에 답이 나왔다.

"뭘 어떻게 해. 길은 하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5명 다 가던지. 안되면 그냥 다 같이 지구에 남아야지. 그게 우리 가족의 선택인 거야."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 그것도 셋 중 왜 하필 막내가.... 혼자 두면 제일 불안하고 어리숙하고 늘 물가에 놔둔 아이처럼 한없이 어리게 느껴지는데. 이 녀석 혼자 멸망하는 지구에 두고 우리만 안전한 곳으로 행복을 꿈꾸며 떠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차마 막내를 남겨둘 수 없었던 엄마 모린의 부정한 선택 앞에 도덕과 진실, 정직의 문제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나 또한 같은 입장이라면 옳진 않지만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 엄마에게 막내란

그나마 극 중 엄마 모린은 물리학박사로 능력이 뛰어났기에 부정행위든 비밀거래든 무슨 조치를 취할 수나 있었지. 만약 별 힘없는 평범한 엄마라서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보나 마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장 내 자리를 줘서라도 아이를 살리고 내가 지구에 남았으면 싶었을 거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며 운명이 바뀐 당사자 아이와 다른 가족들은 더 괴로웠을 거고 아마 그것까지 재빨리 계산했던 우리 신랑은 그냥 다 같이 가던지 다 같이 안 가던지 둘 중 하나라고 답했나 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나도 세 아이 모두 동일하게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막내의 나이가 가장 어리고 가족 안에서 늘 제일 작은 아이이기 때문에 부모의 눈에는 항상 어리게만 보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이 30이 넘은 막내를 아직까지도 애기라고 부른다는 어떤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나도 나중에 그럴 것 같아서 마냥 크게 웃지 못했다.


막내와 같은 나이 시절에 첫째와 둘째는 지금의 막내보다 더 어른스러운 것들을 해냈고 부모로서 그것들을 알게 모르게 당연하다 여겼다. 언니들에게는 '6살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 했던 것들을 막내에게는 '네가 이걸 한다고? 믿을 수가 없네' 싶을 만큼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현저히 낮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나 막내가 한없이 어리고 귀엽다가도 알아서 잘 해내준 첫째와 둘째에게 고맙고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외계 생명체의 공격을 포함해서 모함, 실패, 다툼 등등 여러 위기 속에서도 결국  아름답고 따뜻하게 성장한 로빈슨 가족처럼, 멸망하는 지구나 안전한 새 행성이나 어디에서든지 5명 완전체로 똘똘 뭉쳐서 잘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막내를 포함해 누구 하나 남겨두지 않고 반드시 5명이 함께 하는 것이 우리 가족의 선택이니까 그런 우리라면 아무리 우주에서 길을 잃어도 서로에게 가장 든든하고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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