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퍼배드 4>의줄거리는 그루와 그루주니어를 통해 보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회복, 가정의 중요성, 가족 간의 사랑 그리고 친구와의 진정한 우정, 화해와 용서정도의 보편적인 키워드들로 정리된다. 엄청나게 큰 임팩트나 인상적인 반전 요소가 있지 않지만 슈퍼배드스럽게 좌충우돌 이야기가 펼쳐지는, 아이들과 함께 무난하게 볼 수 있는 가족 애니메이션 무비라 할 수 있겠다. 나쁜 악당이던 그루도 이제 가족을 갖게 됐으니 마냥 나쁘게 살 수만은 없겠지 싶지만 그루 주니어나 메가 미니언즈들의 캐릭터 컨셉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매우 뚜렷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그들의 우당탕탕 사고 치는 모습들이 내가 당할 현실이라면 끔찍하겠으나 가벼운 영화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내려놓았더니 훨씬 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사고뭉치 미니언즈들이 심지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극 중 주인공 '그루'는 악당 전담 처리반 소속으로 활동하며 고등학교 동창이던 빌런 맥심을 검거한다. 하지만 맥심이 탈옥 후 위협에 빠지게 되고 그루와 가족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분을 위장한 채 갑작스럽게 강제 이사를 가게 된다. 평범했던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마치 한국의 강남, 미국의 베벌리힐스와 같이 부촌처럼 보이는 '메이플라워'에 이주한다. 호화스러운 정원과 분수, 럭셔리하게 부티나는 마을 전경을 보며 설레다가 거대한 부잣집들 사이에 초라하게 낑겨있는 알박기 스타일의 안전가옥 주택 앞에 내린다. 모든 것이 영화 스토리상 전개에 필요한 장치들이었겠지만 나는 그 상황이 매우 안쓰럽고 걱정됐다. 그때부터 번개같이 부동산 관점으로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저 집은 결국 매매도 아니고 그냥 전월세 개념인데 자기 집 놔두고 좋은데 가면 뭔 소용인가. 몸테크도 아니고 그냥 사는 곳만 옮겨버린 거네. 뭐 저 집은 악당 전담 처리반 회사꺼니까 들어가는 비용이 없다는 건 좋네. 그래도 저런 부촌에서 다른 집들 대비 본인 집이 초라하니까 자꾸 비교하게 될 텐데 아이들은 괜찮을까. 좋은 동네 인프라와 커뮤니티를 누리려면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위장 신분이라 마음대로 할 수도 없잖아. 갑자기 이사하게 돼서 원래 살던 집은 렌트해 줄 수도 없고 그냥 비어 있는 걸 텐데 아깝다. 거기서 전월세 비용이라도 받으면 좋을 텐데. 하긴 보관이사로 집에 있는 짐 맡기는 비용이 더 들겠네.'
그리고 아이들 교육 문제로 넘어갔다. '어른들과 젖먹이 막내야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세 딸들은 어떻게 하나. 학교는 잘 적응할 수 있나, 친구들이나 동아리 활동들은 어떡하지? 공부하는 수준도 높을 텐데 잘 따라갈 수 있나? 전학 가서 필요한 것들은 다 챙겼을까? 특히 큰 딸은 사춘기 시기인데 반항도 안 하네.' 영화를 보며 거침없이 밀려오는 불안감과 걱정 속에서 대략 30년 여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 서울에서 전학 온 애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을 일주일인가 앞두고 서울에서 경기도로 전학을 갔었다. 나는 초6, 심지어 오빠는 고3을 앞두고 있던 중요한 시기였을 때 이사라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 하다 싶다. 전학 가던 날 우리 반 친구들이 다 같이 연습했던 해바라기의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라는 노래를 울면서 불러줬고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눈물로 배웅해 주셨다. 난 눈 주위가 시퍼렇게 될 만큼 울고 또 울었다. 그리 좋은 동네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내가 세 딸을 키우는 학부모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그때 부모님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대를 다시 따져보니 그때는 모두가 힘들었던 IMF 시기였고 아빠도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며 다시 정착하길 원하셨던 것 같다. 부모로서 안타깝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으리라.
낯선 걸 싫어하는 안정형 타입인데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12살의 나이로 어색한 전학생이 돼서 새로운 반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진짜 끔찍하다.) 속내를 티 내지 못했던 아이라 엄마한테도 별말 못하고 그냥 따라 들어갔다. 지금 우리 딸들이라면 가기 싫다고, 왜 가야 하냐고, 다시 살던 곳으로 가자고, 어색하고 낯설다고, 자기만 친구 없다며 나한테 오만 짜증을 다 냈을 텐데. 상상만 해도 고개가 저어진다. 전학 가서 첫 수업시간이 국어였는데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과목도 국어였다. 국어 교과서를 꺼내서 펼치자마자 내 앞뒤에 앉은 애들이 나를 힐끔거리고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야야 쟤 좀 봐. 서울에서 전학 온 애. 책에 필기 쫙 다 돼 있네. 서울에서 와서 그런가 봐.' 그들의 시선과 얘기가 다 느껴지지만 모른 척 안 들리는 척 신경 안 쓰이는 척 버텨야 했다. 여기선 그냥 일주일만 참으면 방학이니까 버티자 싶었다.
복잡하던 서울 주택가와 비교해서 1기 신도시의 깨끗하고 반듯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친구들과 자전거랑 롤러블레이드도 마음껏 타고 조용한 호수공원을 산책할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시장표 통닭이 아니라 KFC 치킨도 먹어보고 친구 가족의 초대로 예술의 전당에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 중에서 좋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급 낮은 멍청이들 또한 꽤 많았다. 어딜 가든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지만 얼떨결에 이사 간 낯선 곳에서 버텨야 한다는 점이 나에게 더 불리했다. 쉽게 말해 내 나와바리(?)가 아닌 지역에서 처음부터 뚝심 있게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후 나름 잘 적응하고 정착해서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별일 없이 졸업을 마쳤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내 자식들에게 초등학교 전학은 절대 시키지 않을 거라고.
# 00아, 우리 서울 살면 어떨 것 같아?
서울 근교 경기도 신축 아파트에서 산다는 건 특히 엄마와 아이들에게 생활 만족도가 높다. 새 아파트에 초품아, 단지 내 멋진 조경, 여름마다 개장하는 물놀이터, 지상 차량 출입 금지, 도보권에 있는 학원가까지.. 좁고 복잡한 서울과 비교해서 아이들의 안전과 케어가 매우 수월하다. 신혼 초 서울에서 살 때와는 비교가 안 된다.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임은 분명하다.
여기서의 단점은 딱 2개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아빠의 피로도와 서울에 비해 더딘 집값 상승폭. 지각없이 미리 가려면 아침 6시 반에는 나가야 한다. 더 큰 문제는 퇴근이다. 다 같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에는 2시간~2시간 반까지도 걸린다. 결국 매일 최소 3시간을 출퇴근하는 차에서 운전해야 한다. 운전 외에도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시간까지 한 자세로 오래 앉다 보니 멀쩡한 허리도 아플 수밖에 없다. 집값의 경우 단순 비교로 비슷한 시기 우리 집이 1억 오를 때 서울 집은 6억이 올랐다. 올라도 서울이 먼저 오르고 많이 오른다. 얼죽신이라는 말까지 나오지만 그래도 서울은 서울이구나. 수치상의 결과를 확인하다 보니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우리도 서울로 가야 하나 싶었다.우리 애들만큼은 절대 전학시키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이 돼 버렸다.
"우리 서울로 이사 가면 어때?"라고 묻자마자 딸이 대답했다. "싫어. 거긴 지금 내 친구들 없잖아." 칼 같은 대답이었다. 그 후로 시간이 좀 지나서 서울집의 좋은 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의향을 다시 물었다. 잠시 고민하더니 이사 가는 시기가 언제냐고 되물었다. 아예 새 학기처럼 다 같이 반 아이들이 서로를 잘 모를 때 가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다들 친해져 있는데 중간에 가는 건 절대 싫다고 했다.
유명 사교육 컨설팅 코치는 초5 여자아이의 학군지 이사에 대해 조언하길, 먼저 6개월 정도 이사 갈 지역 학원을 다니면서 학원친구도 사귀고 분위기를 익힌 뒤 이사를 가면 훨씬 더 잘 적응할 거라고 했다. 남자아이에 비해 여자아이들은 베프라는 개념이 있어서 친한 친구 무리를 사귀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나도 경험상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너무 친구에 좌지우지하는 것도 원치 않지만 소수라도 본인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건 중요한 부분이다. 아이들이 지금 서울로 전학 간다면 '경기도에서 전학 온 애'가 될 테고 아이가 겪어야 할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상황들이 생긴다는 것도 서울 이사를 망설이게 하는 점 중 하나다.
신랑은 나에 비해 전학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전학 왔던 친구들을 떠올려보면 친구들에 비해 잘 적응하는 애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초긍정의 남자인 그는 우리 아이들이 전학 가도 분명히 잘 적응할 거라며 자기는 전혀 걱정이 안 된다고 세 아이 모두 환경 적응력이 훌륭할 거라고 오히려 날 격려했다.
이 모든 복잡한 상황을 다 뛰어넘고 날벼락같은 아빠의이사 결정을 묵묵히 잘 따라 준 영화 속 그루의 첫째 딸 마고는 그야말로 유니콘 같은 아이였다. 인물 정보를 찾아보니마고는 12살. 내가 전학 갔던 나이와 같이 한국식 나이로 하면 초등학교 5학년이다. 그렇게 착한 마고도 전학 첫날부터못된 학생의 짓궂은 장난으로 얼굴에 반짝이 공격을받으면서 하교하자마자 진짜 짜증 나!!! 를 외친걸 보니 평범한 소녀다. 둘째와 셋째인 에디스와 아그네스도 이사 와서 새로 간 가라테 무술학원에서 만난 다소 강압적(?)인 관장님을 무찌르고 도망치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역시 갑작스러운 이사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모두 적응이 쉽지 않은 듯 보인다.
# 투자 이익실현 vs실거주 만족
이전에 경기도 구축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다가 신축 매매를 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 이유는 나중에 무슨 이유가 생긴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신축이 아니라 좀 더 저렴한 구축 매매를 하려고 돌아다녔는데 하나같이 집을 내놓은 이유가 입주할 새 아파트가 있어서 라는 거다. 그 이야기는, 내가 새 아파트에 입주하다가 뭔가 조건과 상황이 불편해서 이사하고 싶을 때는 구축으로 쉽게 되돌아올 수 있지만, 구축에서 신축으로 가기는 훨씬 어렵다는 뜻이었다. 지금 상황도 그때와비슷하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입성하긴어렵지만, 서울에서 경기도로 옮기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들어가기 어려운 곳은 그만큼더 값지불을 할 만한 가치가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창 악당과의 관계를 정리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루 패밀리.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도 자기 친구들, 반려동물들과 함께 평온한 일상을 즐긴다. 그루는 사건 해결을 통해 위장 신분으로 혼란을 겪던 아내와도 화해했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막내 그루 주니어와도 관계가 돈독해졌다. 본인 집에서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게 된 것. 따지고 보면 그루 입장에서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메이플라워 동네의 안전 가옥보다 자기 마음껏 실험을 하고 가족들, 미니언즈들과 편하게 살 수 있는 기존 집이 훨씬 더 안락한 곳일 수 있겠다. 성경에서도 대궐 같은 집이라도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보단, 작은 집이라도 화목한 것이 낫다고 말한다.
단순히 서울로 가느냐 마느냐 따지기 전에 우리 부부가 원하는 가족의 삶은 무엇인지,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게 맞는지 더 깊은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산 증식을 위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상급지로 이사가기도 하고, 5명의 가족이 지내는 실거주의 만족도를 중요시하며 지금의 삶을 유지하기도 한다. 입성하기 어려운 곳을 뚫고 들어갈 때 얻는 이득과 단점이 있고, 돌아가기 쉬운 곳에서 편히 살 때 얻는 이점과 아쉬운 점도 있다. 정답이 정해진 것이 아닌 모두 개인의 선택이다. 그 가족이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에 따라 최종 의사 결정을 하게 될 것이다.
슈퍼배드 4를 보면서 우리 가정의 부동산 전략을 세우게 될 줄 몰랐지만 의도치 않게 나름의 인사이트를 얻게 됐다. 그루의 세 딸들처럼 우리 아이들도 어디서나 씩씩하게 잘 커가길, 가족의 끈끈한 힘으로 이겨내고 성장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