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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Jul 10. 2024

나쁜 기억 구슬은
'통째로' 날려버리는 남자를 만났다

영화 <인사이드아웃 2>

[해당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또는 사라진(?) 기억


우리 신랑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바로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능력'이다. 내가 기억하는 일이나 어떤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는 가끔 아예 그 시간대나 그날 자체를 통째로 머릿속 기억에서 지워버린 상태일 때가 있다.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그의 기억 속에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된 거다.

"그런 일이 있었나?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기억상실증 수준이다. 분명히 일어난 사건이고 함께 경험한 일인데 아예 그의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그에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다. 큰 실수를 했을 때, 분노하는 상황일 때, 부끄러운 경험일 때, 미안한 상황일 때, 불리한 상황일 때 등등. 

그의 말을 빌리자면, 굳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나쁜 감정에 에너지를 더 이상 쏟고 싶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고 했다. 잊은 '척'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의사가 절개 수술을 하듯, 해당 메모리를 포맷하듯, 감자의 썩은 싹을 도려내듯 그 부위를 가차 없이 날려버린 거다.


# 나쁜 기억 구슬을 날려버리는 기쁨이에게서 그의 모습을 봤다 


그런 신랑의 선택적 기억 태도가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인사이드아웃 2>에서 무릎을 탁 치는 장면을 봤다. 영화 속에서 기쁨이는 주인공 '라일리'의 장기기억저장소에 있던 몇몇 기억 구슬들을 쓰레기장으로 날려버린다. 가족과의 일상, 친구들 간의 우정, 개인적인 학업과 하키 운동 등등에서 좋지 않다고 판단된 기억 구슬들. 라일리가 행복하길 바라는 기쁨이는 고등학교 진학에 집중하지 못하고 도움을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되는 구슬들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고른 뒤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라일리가 과거의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라며 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쓰레기장으로 버려진 기억 구슬들은 빛을 잃으며 의미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화 마지막 이야기에 기쁨이와 슬픔이는 그 구슬들 덕분에 가까스로 신념 저장소로 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라일리는 쓰레기장으로 날린 기억 구슬까지 모두 합쳐질 때야 비로소 아팠던 순간들조차 감내하며 좀 더 나다운 사람으로 성장한다. 제대로 된 사춘기를 겪는 순간이었다.



# 터진 구멍으로 쏟아져 나온 나의 기억 구슬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이상하게 여겼던 그의 선택적 기억 능력이 나에게도 옮겨왔다. 4년 전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고 한동안 꽤나 힘들었다. 집에만 있어도 엄마한테 카톡이 올 것 같고, 초인종을 누르실 것 같고, 내 이름을 부르는 환청도 들렸다. 마지막 호스피스 병원에서 암투병을 하시면서 뼈만 앙상하게 남긴 채 숨을 거두는 엄마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괴롭고 안쓰러웠다. 엄마가 많이 그리웠지만 반강제적으로 이사까지 할 만큼 애써 기억을 삭제했다. 그리고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천국에 계신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엄마의 모든 기억 구슬을 커다란 박스에 담아 밀봉하고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후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무슨 용기였는지 충동적으로 엄마가 보고 싶어서 다시 엄마 사진을 꺼내봤다. 그리고는 그날 밤 신랑 앞에서 엉엉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꾹꾹 눌러 담아 온 나의 기억 구슬이 어디선가 우르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엄마가 아팠던 모습만 자꾸 생각나서 너무 속상하다, 다른 집 친정 엄마가 반찬 해주는 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러웠다, 나도 엄마랑 카페 데이트도 가고 좋은 곳도 모시고 가보고 싶다, 엄마가 나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엄마로 여자로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얘기도 듣고 싶다." 하며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을 나도 모르게 구구절절 털어놨다.



# '기쁨이와 슬픔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영화 <인사이드아웃 2>를 보면 주인공들마다 리더 격인 주된 감정들이 각자 다르다. 예를 들어 라일리는 기쁨이, 라일리 아빠는 버럭이, 라일리 엄마는 슬픔이가 감정 컨트롤 본부의 중앙 자리를 맡고 의사결정을 한다. 각 캐릭터의 메인 감정들이 개인의 주된 성격과 기질을 반영한다.

우리 부부 각자의 메인 감정을 고르자면 신랑은 기쁨이, 나는 슬픔이다. 저 멀리 던져버린 엄마에 대한 기억구슬들이 우르르 터져 나오자 나의 '슬픔이' 감정에 제대로 발동이 걸려서 블랙홀 같은 슬픔 속에 급격하게 빠져들었다. 신랑의 '기쁨이'적인 마인드로는 본인에게 불필요한 나쁜 기억들을 삭제하는 것에 능숙했지만,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지 않고 '슬픔이'인 나의 시간을 기다려줬다. 나의 슬픔이식 행동이 이해 안 된다고 비난하거나 귀찮아하지 않고 그대로 묵묵히 받아줬다. 본인은 남자이고 아들이기 때문에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엄마와 딸의 관계는 일반적인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특별함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엄마의 아픈 모습보다 건강하고 좋았던 모습을 간직하는 것, 엄마가 끝까지 물려주신 믿음의 유산을 소중히 지켜가는 것, 부부인 우리가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줬다.



# 세상에 쓸모없는 기억 구슬은 없다


우리 부부는 그날의 대화로 서로를 응원하며 또 한걸음 더 돈독해졌다. 영화 속 기쁨이가 쓰레기장으로 던진 기억구슬들이 신념 저장소로 돌아와 비로소 라일리다운 모습으로 성장하며 사춘기를 지나는데 큰 도움이 됐듯이, 나도 내가 멀리 던져버려 삭제한 줄 알았던 엄마의 기억구슬들을 다시 품어내면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모습과 방향, 태도에 대해 한번 더 고민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쁜 기억은 가차 없이 '통째로' 삭제해 버리는 기쁨이 신랑에게 배운 것처럼 나도 슬픈 기억을 굳이 굳이 꺼내어 스스로 슬픔 속에만 잠겨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기쁨이인 신랑도 슬픔이인 나도 무조건 기억구슬을 외면하고 삭제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인정하고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는 게 좋을지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는 법을 배웠다.

연애 7년, 결혼 10년 그리고 세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말에 완전히 공감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냥 늙어가지 않고 잘 익어갈 수 있도록 부부로서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자고 다짐한다.

세상에 쓸모없는 기억 구슬은 없다. 좋든지 싫든지 모든 상황과 경험을 통해서 반드시 얻는 교훈이 있다. 이제는 생각 없이 삭제하지 않고, 거기에 너무 깊이 매몰되지도 않으려고 한다. 한걸음 떨어져 생각한 뒤 올바른 신념을 가꾸고 견고히 하며 나다운 모습을 차근차근 완성해가고 싶다. 인생은 이런 삶 속에서 만난 기억 구슬들을 잘 꿰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가는 여정인 것 같다. 그 여정 속에 나와 반대되는 기쁨이 신랑을 만나서 감사하다. 슬픔이스럽지 않은 다채로운 구슬을 꿰어볼 수 있는 기회와 용기가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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