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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Jul 10. 2024

프롤로그

엔딩크레딧을 보며 시작된 이야기


# 가성비 데이트 코스

결혼 전 데이트 장소로 제일 만만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서로 용돈이 여유롭지 못하던 대학생 시절 그나마 낮은 비용 대비 높은 효과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데이트 코스였다.

대략 17년 전 기억을 더듬어보면, 둘이 신촌역 3번 출구 홍익문고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며 데이트가 시작된다. 약속 시간에 만나 같이 서점 구경도 하고 길거리 매장 아이쇼핑도 하며 걷는다. 지금은 cgv가 된 아트레온에서 팝콘, 콜라를 사들고 예매해둔 영화를 보러 입장한다. 둘이서 같이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고 나와서 가성비 좋은 근처 시골밥상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오떡순 가게에 가서 간단히 분식을 즐겼다. 근처 오락실에서 코인 노래방도 가고 농구 게임도 열심히 해본다. 이대 쪽으로 걸으며 또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보이는 예쁘게 생긴 카페에 앉아서 버스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둘이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남자친구와 같이 영화를 보는 자체보다는 함께 본 영화에 대해 길게 나누는 대화가 좋았던 것 같다. 영화를 보며 상대방은 어떤 걸 느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배워가는 시간들이 재밌었다.



#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치

결혼식을 올린 해에 바로 임신을 하고 2년 터울로 아이 셋을 내리 낳게 되며 우리 부부에게 영화관 데이트는 꿈도 못 꿀 사치스러운 이벤트가 됐다. 영화관에 갈 수 없으니 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둘이 몰래 노트북에 이어폰을 꽂고 숨죽이며 보는 영화가 그렇게 재밌었다. 빨리 아이들이 자야 영화를 볼 텐데 그날따라 애들이 안 자면 마음이 급해져서 조마조마 애가 탔다. 영화를 보다가 애가 울거나 깨면 다시 같이 들어가서 토닥여 재우고, 모유수유를 할 때는 중간에 젖을 물려 재우다가 나도 같이 잠든 적도 많았다.

그나마 아이들이 좀 크고 나서는 주말에 잠깐 친정부모님께 맡기고 영화 한 편을 보는 호사스러운 날도 생겼다. 신랑이 개인사업을 시작한 뒤로 평일에 시간이 날 때면 아이들을 학교 유치원에 보내고 여유롭게 영화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3년 전쯤부터는 아예 주말마다 공식적으로 미디어 타임을 가지며 삼탠바이미로 안방에서 영화를 보는 게 우리 부부의 큰 낙이다.



# 부부의 대화를 하기 위한 노오력

연애 시절에도, 부부가 된 지금도 늘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자기라면 어떻게 할 거야?"

"아니 솔직히 저건 난 이해가 안 되네."

"아까 그 장면보고 내가 느낀 게 있어."

사실 아이 있는 부부가 둘 만의 대화 시간을 가지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생각이 나서 무슨 대화라도 해보려고 하면 세 명의 아이가 수시로 다치고 쏟고 엎어서 사고를 치고, "이거 해주세요 저거 도와주세요 여기 보세요 이거 보세요 쟤가 이랬어요 얘만 왜 이거 해요" 같은 질문 공세를 퍼부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일상과 완전히 따로 분리해서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대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대화의 주제도 마찬가지. 대화를 한다고 해도 주로 아이들 이야기나 일상적으로 겉도는 말만 주고받거나 사실 확인, 일정 체크만 하다가 끝나버리기도 한다. 개인적인 속마음을 터놓기가 쉽지 않다.

함께 같은 영화를 보자마자 대화를 이어가면 주제가 생생하고 각자 어떤 걸 느꼈는지 바로 얘기할 수 있다. 영화를 같이 본 행위 자체가 공동으로 새긴 기억이기 때문에 공감대도 크고 둘만의 추억으로 남는다. 결혼 전 연인 시절 서로에게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고 궁금해하듯 대화하던 에너지가 생기기도 한다.



# 205호 시네마 커플석

그렇게 우리 집 안방이 둘 만의 고정 시네마 커플석이 됐다. 별거 아닌듯한 2시간 정도의 영화 감상을 시작으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같이 옛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요즘 고민하는 얘기도 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성격도 드러난다. 둘이 같은 방향으로 생각할 때도 있었고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오랜 연애를 통해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새롭게 알게 되는 면도 있고 완전히 예상 밖의 의견을 꺼내서 신기할 때도 있다. 영화 속 캐릭터와 상황을 통해 서로의 문제를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놓쳤던 부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부부에게 영화는 나름 손쉽게 대화의 창을 열어줄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늘 육아로, 업무로 지친 우리 부부에게도 영화를 보는 건 둘이 합심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진심 어린 얘기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내가 꿈꾸는 가족의 모습으로 기록해 둔 내용 중에 '마음을 나누는 편안한 대화가 있는 가정'이라는 대목이 있다. 신랑과 시네마 데이트를 시작하며 오랜만에 서로 마음을 나누는 편안한 대화를 했고 심정적 갈증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신랑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 대화 시간이 정말 인사이트 있다고 했다.


우리 부부가 영화를 보며 느낀 것들을 소소하게 적어가는 연재 브런치북 <205호 시네마 커플석>을 통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내가 느낀 해소감과 위로, 공감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곁에 있는 이와 같이 영화를 보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의 불씨를 지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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