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팀장'이 된 당신에게 들려주는 오피스릴러 - 8편
일주향一炷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외여행 다녀온 팀원이 선물한 인센스 스틱을 태우며 이 글을 쓰고 있어 문득 생각난 단어입니다. 향 한 대 탈 동안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짧다면 짧은 시간이라 이 글을 탈고하는 시간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짧을지 마음속으로 재 봅니다. 가을의 쌀쌀한 밤이라 플리스를 걸친 나의 앞에는 타들어가는 향과 똑같이 김이 피어나는 보이차, 그리고 푹 잠든 까만 고양이가 느릿한 시간을 흘려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느리고 편안하게 살면 좋겠다고도 생각을 해봅니다. 어제 야근한 지 24시간도 안 됐는데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이라니. 사람이 이렇게 간사합니다. 아무튼,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추운 계절에 실내에서 향을 태우며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진하게 냄새가 올라와 정신을 깨우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면 평소 바빠서 생각하지 않는 나의 상태를 또렷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나는 잘 살고 있는지, 나의 삶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은 어떠한지. 성질이 급한 한국인이자 일하느라 바쁜 월급쟁이로 살다 보면 그런 생각 한번 차분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뇌리에 불이 켜지는 듯한 그런 명징(明澄)함의 순간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뜻밖의 일들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회사 홍보팀에서 언론 인터뷰를 하라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젊은 팀장이 말하는 이 업계의 동향과 본인 하는 일 소개'같은 듣기 좋고 쉬운 주제였는데, 범속한 애송이로서 고민하다 회사가 필요하다면 한번 경험해보자 싶어서 수락하였지요. 기자분과 시간을 협의하였고, 사전 질문지를 받았는데 안일한 마음으로 임한 나에게는 당장 대답하기 어려운 폭넓은 질문들이었습니다. 업무에 시달리다 정신 차려보니 날짜가 임박하여 밤 시간에 혼자 질문지를 열고 예정 답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업에 종사하게 된 계기, 일하면서 보람찰 때, 힘들 때, 이 동네의 미래 등. 다들 이럴 때 멋지게 말하던데, 하고 생각하였지만 이 업계에 들어온 동기를 물으면 '그냥 이력서가 여기 붙더라, 먹고살려고' 따위의 대답을 하는 극한 현실주의자인 나에게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하였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박제가 될 텐데 이상한 답변을 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포장은 포기하고 되도록 솔직하고 담백한 내용을 쓰려고 하니 그 순간 주변이 고요해지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을 느꼈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듯한 일 사이에서 몇 년 간 정신없이 달려온 나를 처음으로 돌아보는 계기였지요. 막상 인터뷰는 평범하게 하였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에 인터뷰가 여러 번 들어와 신문과 잡지, 인터넷 등을 통해 하였는데, 매번 사전 질문지를 볼 때면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나에게 인터뷰를 하느라 수고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는 것과 별개로, 그 경험을 계속 거치면서 일상에서도 문득문득 나를 한 발짝 뒤에서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변화하였다고도 볼 수 있지요. 회사 직원에게 말할 때, 0.1초의 짧은 시간 동안 '멈칫'하는 느낌과 가깝습니다. 멈칫하는 느낌과 함께 어쩐지 전보다 단어를 고르고 언행에 신중하게 되었는데, 교활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전보다 겸허해진 걸까요. 어느 쪽이든 인터넷에 박제될 때마다 날것의 나를 마주하고 거친 부분을 쓸어내 건조한 나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향 세 대가 탔으니 삼주향이라고 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