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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색 한 스푼 May 26. 2021

타인에게 이해받는 법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법

이해의 종류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이해는 생각 외로 복잡한 것이다. 이해라는 말 자체가 한 가지의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맥락으로 나누어 보자면 학문적 깨달음으로써의 이해와 언어적 공감으로써의 이해, 그리고 심리적 수용으로써의 이해가 있다.

학문적 깨달음으로써의 이해

이해의 첫 번째 종류는 학문적인 것이다. 수학 문제의 풀이를 이해한다거나, 외국어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주로 '설명을 이해하다''규칙을 이해하다'처럼 사용할 수 있는 이해이다. 이런 의미의 이해는 '알아듣다' 혹은 '깨달았다' 정도로 해석해야 올바르다. 인간관계에서의 이해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의미이지만, 이해의 기본적인 배경 의미가 된다.

언어적 공감으로써의 이해

이해의 두 번째 종류는 언어적인 것이다.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이해가 바로 여기에 포함된다. 즉,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는 이해의 대부분이 언어적 수용으로써의 이해인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생겨나는 것은 필요한 사람이 구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던져주는 "이해한다"는 한 마디가 사실은 자신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고민이 생기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주변의 친구나 지인에게 이를 털어놓음으로써 대부분을 해결하려 한다. 그럴 때 자신에게 반박하며 혼을 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맞아, 충분히 이해해"라고 맞장구치며 공감해주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먼저 기술한 것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이해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공감하는 상대방의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또 진심인지는 알 수 없어도 당장에 편을 들어주니 실제로 힘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써의 이해가 어떤 때에는 이기적인 이해가 될 수 있다. 공감해주는 '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뻔하지만 받는 이해가 진심이 담긴 공감인지, 혹은 공감하는 '척'인지 구분하는 일은 스스로 해야만 한다.

심리적 수용으로써의 이해

사람이 받고 싶은 이해 중 가장 이상적인 이해가 바로 심리적 수용으로써의 이해이다. 이는 심리상담 상황에서 주로 경험할 수 있는 이해인데, 상담사가 공감적 이해와 더불어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수용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언어적 공감으로써의 이해와의 차이는 누군가가 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민이 생겼다거나, 힘든 일이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알아채어 위로해주는 것 역시 이에 포함될 수 있다. 주변인과의 관계에서는 주로 공통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서로가 고유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에서 심리적 수용으로써의 이해를 접할 수 있다. 가령, 자신이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다면 이미 그 일을 겪어본 누군가가 자신의 고민이나 존재 자체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결코 이기적인 이해가 될 수 없다.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주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심리적 수용받기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서 언어적 공감으로써의 이해를 받고 힘을 얻으며 어떤 때에는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사실은 그것이 이기적인 이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아가 또다시 이해를 구하게 된다. 그렇게 반복되었던 것이 지금껏 받았던 이해다. 받는 이해 전부가 이기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심리적 수용으로써의 이해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해받는 법"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해"라는 게 무엇인지 설명하는 글이 얼마나 지루하게 보일지 잘 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해받을 수 있는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이해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원한다. 그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은 만큼 그 사람도 내게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이해를 어떻게 줄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원하는 만큼 나도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부터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상대방은 어떻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해받고 싶다'가 혹시 '이해만 받고 싶다'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그 역량을 늘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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