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사람이 되기까지
아무 말이나 써도 좋으니 일단 타자기를 두드려 본다. 새로 산 키보드가 썩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타건감이 꽤 만족스럽다. 너무 가볍지만은 않고 그렇다고 묵직하지도 않은 적당한 타건감이랄까. 이 키보드를 사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사길 잘한 것 같아. 키보드를 새로 장만했으니 매일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명분이 생겼달까.
난 무슨 일을 시작할 때 뭐든 장비부터 사는 편이다. 인생은 장비 빨 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영상과 디자인 외주를 받기 위해 맥북을 사고, 편안한 작업을 위해 로지텍 버티컬 마우스를 샀다. 그 외에 노트북 케이스, 노트북 받침대... 여튼 나는 일을 해서 버는 수익보다 장비에 투자한 값이 더 나가는 것 같다. 뽕(?)을 뽑아야 하니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난 아직 세상을 잘 모르고 어리숙하고 귀도 얇다. 이 험한 세상을 호구로 살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췄다. 친구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아무에게나 보증을 서주지 말라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밤에 일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거기다가 글까지 쓰고 있으니 난 진짜 미친 게 확실하다. 근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쑥불쑥 올라오는 우울의 감정이 내 온몸을 지배한다. 그 특유의 기분 나쁨이 난 너무 싫다. 축 처지고, 가라앉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불안하고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제는 내가 우울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럴 땐, 보통 잠을 잤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먹지도 싸지도 씻지도 않고 주말만 되면 잠만 잤다. 겨울잠 자는 곰처럼 10시간씩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 늦게 일어나면 그 허탈한 기분과 자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회사 다니면서 유일하게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주말인데 나는 이렇게 잠만 잤다니... 내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 없다.
부지런한 삶을 동경했다. '저 사람은 하루를 일찍 시작해서 책을 읽는구나!', '주말 오전에 사람들은 청소하는구나!' 유튜브를 보면서 요즘 말로 '갓생'을 사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었던 어느 날 다짐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출근하자!' '집에 와서는 매일 글을 쓰는 거야' 엄청난 다짐과 준비로 아침 시간을 확보하기로 했다. 알람은 사진을 찍어야만 꺼지는 앱으로 설정해서 새벽 6시에 무조건 침대에서 일어나서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처음 3일 정도는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나름 모닝 페이지도 작성했다. 비몽사몽으로 적는 모닝페이지에는 '졸리다', '회사 가기 싫다'라는 말만 가득했다.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모닝 페이지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 맞는 기록방식이 있었지만 난 그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 눈이 멀어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그게 잘 될 리가 없다. 계속되는 실패에 오히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병원 선생님께서는 진료하실 때 가끔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하신다. 질문을 잘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질문이 생길 만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늘 고개를 저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선생님께서 질문 타임을 주시면 살면서 살짝 스쳤던 의문들을 얘기하곤 한다.
"어떻게 하면 부지런하게 살 수 있을까요?"
"아직은 몹시 어렵죠. 이제 막 독립해서 자취를 시작했고 우울증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도 벅찬 일인데 부지런까지 한 건 욕심입니다. 지금은 회사생활 잘 버티면서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걸로도 잘하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의 대답은 늘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느낌이 든다. 어렸을 때부터 표현을 가슴으로 삭히던 나는 이런 내 마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누군가 호소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돈을 많이 벌면 그런 변호사를 선임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타난 게 너무 신기했다. 정확히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해주셨다. 이미 나 자신에게 수없이 했었던 말이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위로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생활이 너무 벅차지만 다들 하는 것이니까 버티고 버텼는데 선생님께서는 지금 그렇게 쥐어짜면서 힘을 내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셨다.
부지런한 삶은 아직 욕심일까. 그래도 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글 쓰고 책 읽는 시간만큼은 습관을 들이고 싶어서 퇴근하고 돌아와서 하루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책을 읽었다. 못 읽더라도 가방에는 꼭 책 한 권과 일기장과 노트를 가지고 다녔다. 무엇이든 적기 위해서. 그렇게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여전히 어렵고 침대에 바로 누워버리고 싶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이제는 나 자신이 조금은 부지런한 사람을 닮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닮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