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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랏차차 Apr 16. 2024

무작정 10km

이게 마라톤의 맛인가

2024. 4. 15. 월요일. 안녕 일기장아!!(기분 업)


정말 기쁜 소식이야.

나 어제 내 인생 처음으로 마라톤에 나갔고, 처음으로 10km를 뛰어봤어. 여기에 마음껏 자랑하고 싶어!!


마라톤의 시작


2월 중순, 수행하던 사건이 상고심까지 간 끝에 상대방의 상고가 심리불속행 기각되면서 승소 확정이 되었어. 시니어 변호사님이 함께 사건을 수행한 5년 차 주니어 변호사님과 함께 밥을 사주셨어. 변호사님들이랑 밥을 먹으면 사건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니어 변호사님은 주니어들이 요새는 무슨 관심사가 있는지 물어보는 분이야. 일 이야기보다는 사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시니어 변호사님이야!


심리불속행이란 형사사건을 제외한 상고사건 가운데 상고이유에 관한 주장이 법이 정한 사유를 포함하지 않으면 심리를 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이다.


아무튼 그날도 나와 5년 차 선배 주니어 변호사님한테 '요새는 뭘 하며 지내?'라고 물으셨어. 아니 그런데, 5년 차 선배 변호사님이 3월 휴가를 내고 일본 나고야로 풀마라톤을 뛰러 간다는 거 있지? 여기서 두 번 놀랐는데, (1) 처음으로 풀마라톤을 뛴다는 것 (2) '휴가'를 '마라톤'을 도전하는 데에 쓴다는 것이었어. 아니... 자고로 휴가는 그저 휴양지에서 몸 녹이거나 관광지를 하나라도 더 둘러보기 위해 쓰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마라톤을 위해 나고야로 휴가를 간다니... 조금 낭만적이지 않아? 선배는 나보다 체구도 작은데 풀 마라톤이라니 말이야. 우선 마지막까지 힘내서 달려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하루에 5킬로씩, 10킬로씩 뛰어보고 있다는 선배의 말이 너무 단단하고 멋졌어.


나고야에서는 매년 3월 세계 최대의 여성 마라톤이 열린다.


나 너무 감명 깊었나 봐. 그 자리에서 "선배님, 저도 그거 해볼래요!!"라고 말했어. 살면서 마라톤에는 관심 없던 나인데, 대체 마라톤이 무엇이길래 휴가를 내고 일본까지 가서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 말을 하는 선배 변호사님 눈이 반짝여서 그만!


그 자리에서 변호사님이 4월에 하는 마라톤 중에서 귀여운 마라톤이 하나 있다면서 유명빵집 빵을 기념품으로 주는 빵빵런을 추천해 줬어. 그날 식사를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야근하는 동안 바로 회사 친한 동생을 꼬드겨서(?) 빵빵런에 바로 그냥 신청해 버렸지. 뭐 마라톤 훈련은 차차 하면 되지~ 하고 우선 신청부터 해버린 거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는데,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


런닝 크루의 결성


마침 이 동생이 같은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동네에 천변이 있어서 같이 런닝을 했어. 2킬로 정도만 뛰고 근처 오리 구경에 정신이 팔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런닝이 생각보다도 뿌듯한 운동인 것을 깨달아버렸어. 뛰고 난 후에는 긍정에너지가 넘치더라고. 야근하고 집에서 누워서 유튜브를 볼 시간에 집 밖에 나와서 달렸다는 것, 달리다가 멈추고 싶은 순간을 참았다는 것. 시작도 귀찮고, 할 때도 힘든데, 하고 나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그날 런닝 사진을 스토리에 올렸는데, 그걸 본 동네 주민인 회사 동기오빠까지 합류하면서 나름 '**동 런닝크루'가 결성되었어. 듬직하고 체력 좋은 막둥이가 주장, 지쳐갈 때 즈음 박수소리로 기를 넣어주는 동기오빠가 오락부장, 일 벌이는 걸 좋아하는 내가 총무. 소박한 인원이지만 나름 조합이 좋아. 바로 이틀 뒤에 크루가 모여서 같이 뛰었어. 크루 덕분에 겨우 5킬로를 뛰어보고서 긍정에너지가 넘쳐 버려서, 그다음 날 아침에도 셋이서 톡방에서 '너무 뿌듯해'를 연신 말했어.


그런데 막상 3, 4월은 법원 성수기(?)라서 몰려드는 서면에 막상 뛰어볼 시간은 별로 없었어. '아 10킬로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더라. 일단 모든 운동은 장비빨이니까(!) 선거날에 장비에 돈을 좀 썼고, 목표는 '완주하기'로 현실적으로 잡아봤어.


마라톤 전날인 토요일도 막상 해야 할 업무들이 많아서, 증인신문사항 2개를 회람하고 누워보니 당일인 일요일 새벽 1시더라. 휴. 마라톤을 한다니까 생각이 많아져서 한 시간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어. 꿈자리도 뒤숭숭해서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았어.


어찌어찌 마라톤의 날이 밝아버렸다!!


한 5시간 잤을까? 7시 반쯤에 겨우 인나서 8시에 우리 크루 주장친구랑 투썸 앞에서 만났어. 택시를 불러 같이 이동했는데 갑자기 택시 기사님이 평화공원이라면서 내리라고 했어. 그냥 작은 동네 놀이터 같은 곳이어서 이게 뭐지 어리둥절. 알고 보니 상암 평화의 공원이 아니라 마포 평화공원(!)이었어. 카카오택시 목적지를 '평화공원'이라고 찍었던 거지. 아저씨의 눈총을 씨게 받으며 상암 평화의 공원으로 다시 가달라고 했어. 내리기 전쯤에 '기사님 저희 마라톤 완주하라고 응원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아 그냥 힘들면 하지 마'라고 해서 머쓱해졌지 뭐야. 덕분에 속으로는 '나 반드시 완주를 하리라'라고 마음을 먹었지!!


택시로 조금 돌아서 오다 보니 마라톤 시작 10분 전쯤에 겨우 도착해서, 몸 풀 새도 없이 그냥 달렸어. 옆에서 친구가 몸 풀라고 뭐라 뭐라 했던 것 같은데, 이미 도파민이 너무 넘쳐서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았어. 인파들 틈에서 그냥 헤헤 웃으면서 달렸어. 아래 사진을 봐바 내 친구도 웃느라 볼이 짱구야.



0~5km 엄살과 후회의 구간


시작하고 3km 정도까지는 친구랑 쉬지 않고 뛰었어. 사람들이 한 번에 출발하다 보니까 첫 1km까지는 느리게 뛰었어. 1km를 넘어서면서 '아 아직도 9km야?', 2km를 넘어서자 '아니 이걸 5번을 더?' 하면서 속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고, 숨도 가쁘고 다리도 무겁더라. 친구가 옆에서 달리니까 견뎌보자 하고서 3km 정도까지는 쉬지 않았는데, 3km에 그만 쉬어버렸어. 그때부터 5km까지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 5km를 달릴 때까지 계속 속으로 '5km 코스'할 걸 후회가 들었거든. '하 대체 풀마라톤을 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 아무튼 나는 친구를 그냥 보내주기로 하고, 혼자서 달렸어. 친구는 내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해.


5~7km 무념무상의 구간


5km가 곧 오는구나 하고 달리는데, 아니 5.5km가 반환점이더라. 한 4km 정도에서부터 벌써 선두그룹에서는 반환점을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어. 와~ 얼마 뛰지 않은 나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멋지게 뛰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경외심도 들었지. 언젠가는 반대편에서 친구를 보겠구나, 친구랑 마주쳤을 때 걷고 있지만 말자 하는 마음으로 뛰었어. 그렇게 5km를 지나자 반대편에서 얼굴이 빨개져서 오는 친구랑 마주쳤어. 열심히 달리는 친구를 보니까 그때 다시 좀 힘이 났어.


달리는 동안 '파이팅~~!'소리와 함께 손뼉치며 달리는 사람, 빵이 컨셉인 마라톤인만큼 빵 분장?을 한 귀여운 사람들을 마주치는데, 힘이 나더라. 각자 다 따로 달리고 있지만, 함께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아 이게 마라톤의 맛인가?!



겨우 달려서 5.5km 반환점까지 왔어. 물을 마시려는데 종이컵이 다 떨어졌다고 다음 지점의 급수대를 이용하라더라. '아 저 목이 너무 말라요... 거기 그냥 페트병 그대로 주시면 안 되나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일단 다시 달렸어. 목이 너무 말라서 그냥 ‘아 어서 물 마시고 싶다’는 생각만 가지고 달렸다. 그랬더니 그냥 또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 없이 뛰어지더라.


7~10km 다리가 그냥 움직이는 구간


7km 정도부터였던 것 같아. 심장과 다리는 엄살피우기를 멈췄고, 숨은 가쁜데 그래도 그냥 달려졌어. 어느새 주변을 보는 여유가 생겨서, 아직 지지 않은 개나리들을 구경하고, 나랑 같은 페이스로 뒤에서 뛰던 커플이 하는 시시콜콜한 수다도 들었어. 침을 놓으면 놓은 자리에 항생을 위한 유익한 균?들이 모여들면서 낫는 원리라고 하더라. 느지막이 달리기 시작했는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누나랑 초등학생 남동생이 열심히 뛰어 오는 것도 보였어. 다리가 조금 가벼워지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머리 속이 시원해졌고 마음은 즐거웠어. '10km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후반부에는 그냥 몇 사람 뒤통수만 보고 아 저기까지만 가자~하면서 달렸던 것 같아. 9km 정도 되니까 원래 좋지 않던 발목이 지끈지끈하더라. 무리는 하지 않더라도 계속 걷지는 말자 하면서 느리게 뛰고 걷기를 반복했어. 어느새 멀리서 행사장 소리가 들려왔어.



행사장 소리에 다시 으쌰~힘내서 달렸어. 내 옆의 사람들도 마지막에 힘을 짜내서 달리더라. 행사장 소리가 주는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면서. 목표 시간을 몇 분 남기고 도착했어. 정신이 없어서 친구가 도착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어.


둘이서 완주의 기쁨을 나누고 완주 기념품도 받아 왔어. 빵빵런 메달 좀 봐. 정말 귀엽지 않아? 빵빵런 메달 들고서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어. 다음에 또 마라톤을 같이 나가자고 다짐했어. 마라톤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니 7명이 릴레이로 풀마라톤을 뛰는 게 있는데(올해 3월에 이미 끝났다), 그땐 우리 크루 오락부장 오빠도 꼭 같이 뛰자고 우리끼리 결정. 7인 1팀으로 참여하다보니 코스프레도 많이 한다고 하더라. 빵빵런에서 분장을 하면서 뛰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자극 받았어. 다음 해에는 코스프레를 하고 릴레이 마라톤에 나가겠어! 이 말을 꼭 지켜서 이 곳에 후기를 쓸게.



근처 망원으로 이동해서 고깃집을 갔어. 처음 고깃집은 유명한 곳으로 가봤는데, 아니 그 매장이  빵빵런 참가자들(다들 빵빵런 옷을 입고 있다)로 만석이더라고. 고기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다시 검색해서 근처 고깃집에 갔어. 삼겹살과 하이볼을 시켰어. 친구와  완주 후에 먹는 첫 삼겹살의 맛, 하이볼의 맛을 함께 음미했지. 아 하이볼 한 잔을 하고 친구랑 눈이 마주쳤는데 웃어버렸어. 누가 봐도 우리 둘은 같은 극락을 느끼고 있었어. 목살도 추가했어.


이거 참말로 맛이 좋구나. 고기의 맛인지, 보람의 맛인지.



집에 돌아와서는 빵빵런 기념품들을 확인하고, 샤워하고나와서 빵빵런 기념품으로 받은 마스크팩을 하면서, 스스로를 듬뿍 칭찬해 주는 시간을 가졌어.


이번 봄에도 부지런히 나를 찾는 시간을 가졌구나.

안 해봐서 몰랐지, 마라톤 이거 해보니까 꽤 보람차고 행복한 일이구나.

꾸준히 체력을 올리고 런닝해서 다음에는 기록에 도전해야지. 발목이 아픈 걸 보니 런닝 자세도 배워야겠어.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나고야로 풀마라톤을 뛰러 가야지. 그땐 마라톤을 추천해 준 선배한테 같이 가자고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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