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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Dec 01. 2021

학교를 떠난 사람들은 이상 세계를 꿈꾸는가

덕성여대 <포스트 모더니즘> 중간 과제물 + 후속 연구 

 


푸코는 <감시와 처벌> 제 2장에서 엄격한 규율은 훈육의 기능을 담당하고 이는 다수의 개인을 조직적인 집합체로 만들기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언급한 바 있다. 개인은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도구이며, 이를 위해 권력은 ‘감시, 상벌제, 시험’ 등의 수단을 활용한다. 특히 푸코는 학교를 훈육의 담당기관 중 하나로 보았으며, 그 예로 초등 교육의 재편성 이후 학생 중 일부에게 교사가 담당해야 할 업무를 분할하고 학생들이 학생들을 감시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꼽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회장, 부회장, 그리고 도서 부장이나 미화부장 등이다. 즉, 푸코에게 학생 간 상호 교육은 상호적인 동시에 위계적인 것이다. 이 말들이 어렵다면 당신의 학창 시절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명단에 올라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공부란 벌을 받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라는 일종의 밈(meme)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푸코는 이를 긍정했다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 우리는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다. 그럼 모든 것이 끝날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졸업하게 되면, 그것으로 전부 끝날까? 이 문단을 전부 읽은 당신에게 질문 하나를 제시하려고 한다.


 당신은 부조리한 규율에 추종합니까? 



사람들은 부조리와 규율, 그리고 추종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로 인해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이미 고도로 감시와 처벌을 반복하는 집단인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다. 당신은 학교의 체제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만 쉬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유니폼을 입고 규율을 지키는 행위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은 사실 학교의 체제에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적응한 사람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과정과 고등 교육과정을 모두 수행한 자라면 그러할 것이다. 비극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된다. 나는 학교의 체제가 취미 생활 집단에서 반복되는 것을 자주 목도한다. 바로 주로 고등학생 이상, 성인들이 교육과정을 수행하거나 교육과정 수행이 끝난 이후 취미를 즐기기 위해 생성하게 되는 연극과 뮤지컬 취미 집단인 연뮤덕 집단이 그 예이다. 



 연뮤덕 집단은 왜 감시와 처벌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 기준은 무엇일까? 여타 취미 생활 집단 중에서도 연뮤덕 집단은 특히 ‘규칙’과 ‘경계’가 뚜렷하게 나뉘어 있다. 이 집단은 특정 SNS(트위터, DC 인사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인데, 배우가 검색을 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검색 방지용 언어를 사용한다. 또 퇴근길에서 주어도 되는 선물과 금기시되는 선물 목록들이 있고, 배우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말 것 등, 사생활과 관련해서 배우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의 규칙이 존재한다. 그 외에도 좌석 티켓을 구매하지 못하는 경우와 그 극을 아예 보지 못한 경우 ‘못사’ 라는 용어로 칭하며 해당 극에 대한 언급을 자제할 것, 양도 양수의 룰을 지킬 것 등 내부의 규칙이 매우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는 편이다. 만약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처벌이 이루어지는가?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소통의 창구가 SNS라는 데 초점을 맞춰 보자. 푸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술에 의해 권력의 효과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특정 기관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이것은 판옵티콘이나 감옥, 혹은 학교의 예시였을 것이나, 공개적인 집단 내에서는 연뮤갤, 트위터의 공개 계정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위에서 언급한 규칙들은 명시적이지 않고 암묵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 내에 공공연하게 자리 잡은 ‘암묵적인 룰’을 수행하지 않았을 때 해당 트윗이 ‘소리 없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마냥 RT 수가 증가한다. 비공개 계정으로 트윗을 인용하는 것이다. 이런 인용 알티는 트위터라는 SNS를 이용하는 집단이 대체적으로 바로 오류를 지적하는 편이 아니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집단의 룰을 어기거나 해쳤을 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기보다는 비공개 계정을 이용한 인용 알티를 통해 ‘눈치’를 준다는 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보아야 하는, ‘시선의 기술’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눈치’ 이후에는 사과문이 올라온다. 종종 이러한 사과문은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문서라기보다는, 오프라인에서 직접적으로 만나 교류하는 상황이 잦은 집단의 새로운 자아인 트위터 계정에 붙이는 주홍색 글씨 같은 역할을 한다고 느껴진다. 이런 규칙들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푸코에 따르면 시선은 권력이 기능하는 부속품 같은 요소이다. 그렇다면 연극 뮤지컬 덕후들의 권력은 누가 어디로 향하는가?  



최종적인 권력은 이제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권력은 집단을 움직일 수 있게 하도록 만든다. 앞서 말했 듯 우리는 12년간 착실한 학교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나이를 말하면 학교의 수준과 학년까지 알 수 있는 사회 아닌가. 사회의 이러한 규칙들을 내재화한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잘 돌아가는 집단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생성하는 집단 역시 다를 바 없고 우리는 영원히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어떤 집단이 '효율적'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수적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나 역시도 그 규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규칙을 모른다면, 규칙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공론화' 하거나 문제시 삼는 것은 과연 권력에서 자유로운 행위인가? 남들은 그러면 안되지만, 본인은 권력을 취하고 싶어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하위 구조에 잔류하면서도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즉 ‘회장과 부회장’의 환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그 환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매트릭스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의 사이에서 빨간 약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고, 빨간 약을 선택해도 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상 사회를 꿈꾼다. 적어도 꿈꾼 적은 있다. 규칙이 없으면서도 평화로운 집단은 정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학교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어도 우리는 또 다른 감옥 안에서 이상 사회의 꿈을 꾸는가. '나는 안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고, 행동하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 연뮤덕이라는 집단 내에서 당신이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사회에서건 우리는 감시받고 감시 하지 않는 통제란 없다.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가 말하기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다원화는 통제와 시선을 뿌리칠 수 있는 무기다. 


결론이 빈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미 단순 과제를 다듬고 문장과 결론을 추가한 데다가, 이에 대해 다른 근거를 들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와 지속적인 푸코 독해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은 여기에서 마무리해둔다. 추후 글의 끝을 더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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