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자주 무너지는 인내 위에 나를 다시 쌓아 올리는 하루들의 연속이다. 샤워 후 젖은 발로 거실을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고, 서로 위험한 장난은 그만하라고 해도 결국에는 찧고 다치는 경우도 있다. 끈적한 음료수를 차 시트에 쏟고도 해맑게 웃는 아이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언성을 높이다가도 미안해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면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는데—
아이들을 씻기고 나서 잠자리에 든 천사같은 표정을 볼 때면, 그랬던 하루의 미안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온다. 아이들은 잘 먹고, 잘 씻고, 잘 놀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는데, 조금 더 참아볼걸 그랬다는 생각들. 잘못이라 해 봤자 그렇게 커다란 일도 아니다. 아이들의 건강한 욕구와 활기로 인해서 그 모든 것들이 생겨난다. 아이들이 세상을 탐색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겪게 되는 방식들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는 것과 함께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의 사소한 잘못에 수백 수천 번의 같은 말을 해주는 사랑.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아무리 지치는 순간에도 다시금 아이들을 안아주어야겠다는 다짐에서, 나의 부모님의 나를 길러주신 마음 너머 불현듯 신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과 성마른 태도로 그르친 일, 삿된 생각과 인격적인 모자람 앞에서 신이 오래도록 베푸는 인내와 자비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그에 비해 나의 한없이 가볍고 덧없는 참을성은 어떠한지에 대해서.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나를 사랑하는 신의 무한한 자비를 생각해보게 된다.
육아의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 아이의 예민한 감정이 날 선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이 유독 어렵다. 나를 닮았다고 느끼는 아이의 한 조각. 어릴 적의 나는 꽤나 예민하고 쉽게 불편해했다. 옷감이 조금만 까슬해도 하루가 온통 망가진 것 같았다. 지금껏 흔한 장신구 하나 제대로 착용해본 적이 거의 없다. 감정은 더 복잡하게 작용했다. 기복이 심한 날들 속에서 어떤 것이 나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지난 만남과는 다른 감정을 안고 누군가를 대하는 나 자신과 그로 인한 상대방의 표정을 보는 것이 스스로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듯 흔들리는 유년 시절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일텐데, 나는 절제된 감정과 옳은 판단에서 비롯된 바른 행동에 대한 갈망이 컸던 것 같다. 차라리 마음대로 살았더라면,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기고 흔들렸더라면. 어떤 바름을 향하고자 하는 정체성이 내 안에 이상하게도 깊이 박혀 있었고,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종교적 신념이 그 중심에 있었다. 나를 보호하기도 했지만,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해 깊은 의문을 남겼던 그것.
그래서인지 키우는 아이가 제 감정에 충실하고, 충동적으로 반응하고, 옳고 그름에 앞서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나에게는 너무나 오래 허락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아이는 살아가고 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고도 몹시 불편한 것이다. 그 낯설은 자유로움 앞에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억눌러온 흔들림을 다시금 느낀다.
그것은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나의 모습, 그리고 오랫동안 벗어내고자 애써온 내 모습의 잔상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는 그런 내면과의 싸움 속에서 감정을 조율하고, 타협하고, 누르며, 가까스로, 이제야 겨우 봐줄만한 오늘의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육아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나의 모습을 아이의 얼굴을 통해 다시 만나는 일인 것이다. 감정이 쉽게 요동치고, 세상의 크기를 제 감정만큼이나 오해하는 그 시절의 내가 눈앞에서 다시 시작된다.
자주 무너지는 인내, 그 다음에 여전히 깊은 반성이 따라온다. 나는 나의 오랜 여정이 얼마나 더디고 험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왜 이토록 작은 모습에 화를 내었을까.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얼마나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는 일인지를 아는 내가, 그 앞에서 아이를 다그쳤다는 사실이 다시 나를 절망케 한다.
그 반성 속에서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가 보일 수 있는 자비란 완성된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나를 마주한 자리에서 다시 아이를 품어내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된 자에게 주어지는 어떤 보상이 아니라,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를 품어내는 사랑이라는 것을 아이가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신이 내게 오래도록 보여준 자비가 이제서야 내게 안착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제때 도달하지 않은 사랑이라도, 그 자체로 실패했을리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너무 이르게 도착한 마음보다도 늦게 발아한 사랑은 더 깊이, 더욱 조용히 사람을 바꿔놓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육아는 아이를 자라게 하는 일이자, 동시에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함께 자라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자비라는 것을 배우고, 신의 사랑을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