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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음 그리고 쌓음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결국은 돌을 뚫는다.

by StarCluster

1. 어린 시절 밑창이 다 닳을 때까지 신었던 신발이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게 집이 어렵다고 직접 말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집안 사정 정도는 어림 짐작할 줄 알았던 어린이었다. 당시에 무엇을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사달라고 하면 분명 사주셨을 것이다. 그래서 더 그러지 않았다. 신던 신발이 길들여져 편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신발의 뒤꿈치 바깥 부분 밑창에 구멍이 날 때 까지 신었다.


비오는 날이면 바닥에 고인 빗물이 뚫린 밑창을 타고 신발에 들어왔다. 발등이나 발가락이 아닌 뒤꿈치부터 양말이 젖었다. 이를 알게 된 엄마는 바로 나를 데리고 시장에 가서 신발을 사 주셨다. 값은 엄마가 치르셨으나, 나는 항상 가격이 궁금했던 아이였다. 그 금액만큼 또 잘 신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새 신발을 며칠 신고서 살펴보니 역시나 뒤꿈치 바깥쪽이 조금 닳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 안의 다른 신발들도 그랬다. 그 때 처음으로 신발은 뒤꿈치 바깥쪽부터 닳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교사 임용시험에 마지막으로 응시하던 해, 자주 쓰던 볼펜이 있었다. 아침이면 아이를 챙겨 어린이집에 등원 시키고 독서실로 향했다. 하원시간이 되면 데리고 집에 와 놀아주며 저녁을 준비했다. 퇴근한 아내와 함께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힘찬 노래 한 두 곡을 들으며 독서실에 갔다. 공부하는 시간 자체가 너무 소중했기에, 외운 것들을 하나하나 펜으로 모조리 써내려가는 것이 그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다.


막힘 없이 쓰되, 너무 날리지 않도록 적당한 저항감이 있는 펜을 하나 골랐다. 약간의 필압으로도 마음에 드는 필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고른 펜으로 일주일에 펜 심 한 다스 이상은 쓸 만큼 외운 것들을 적어내어 놓아야 안심이 되던 시간을 보냈다. 머릿 속에 새긴 것들을 문장으로 풀어놓을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시험이었다. 좋아하는 5mm 격자 노트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어 치열하게 썼다. 그 때 처음으로 펜 심 하나로 몇 장의 내용을 적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3. 엄마가 운영하는 미용실을 아빠가 리모델링 해주시던 시기가 있었다. 엄마는 아주 어릴 때부터 팔의 근육과 뼈에 병이 있었다. 긴 수술과 입원, 재활 기간으로 인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졸업하지도 못했다. 살이 움푹 들어간 흉터가 길게 나 있는 팔로 자격증을 따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가위와 드라이기를 들어 그들의 머리를 정성스레 매만지셨다. 엄마는 여름에도 긴 소매옷을 입고 생활하셨지만, 스스로도 그런 팔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자, 감사할 일이라고 매번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엄마의 흉터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존경했다.


엄마는 손님들과의 약속을 지켜가며 이십 년이 넘게 동네에서 미용실을 운영하셨다. 내가 알고 있는 단골들도 많다.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갔던 손님들이 한 번씩 방문해서 머리를 하고 가는 것도 종종 보았다. 엄마 혼자 운영하는 미용실, 수십 번의 계절을 지내신 그 좁은 공간, 맞이한 손님들이 앉은 의자 바로 뒤가 곧 엄마가 가장 오랜 시간을 서서 보낸 자리였다. 어느날, 엄마가 서 있던 그 자리의 장판 바닥이 패이고 희게 닳아 있는 것이 눈에 선연히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사람의 시간이 공간에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내가 '수적천석(滴水穿石)'이라는 단어를,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결국은 돌을 뚫는다."는 말을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작은 걸음들이, 작은 단어들이, 작은 동작들이 하나하나 쌓여 만든 시간. 닳아버린 신발 밑창, 다 쓴 펜 심, 패여진 바닥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분명히 남는 흔적들.


그 어떤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곧바로 손에 쥐게 되는 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결국은 단단한 돌도 뚫는다는 그 말처럼 허투루 지나간 적이 없고, 그 어떤 날도 헛되지 않았다.


닳아 없어지는 줄만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 안에 가장 깊이 새겨진 것들이 되었다. 타인의 눈에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그 모든 닳음은 결국 한 사람을 만들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어 쌓였다. 그렇게 닳도록 경험하고, 익히며, 사랑한 모든 것들은, 결코 내 안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 2012. StarCl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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