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10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3층 임용시험 준비실에 앉아 평소 습관처럼 책을 펼치고 펜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은 어제와 같았다. 그래서 정말 갑작스럽고 더욱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신 활동의 기능들이 고장이라도 난 듯, 옴짝달싹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번아웃은 그렇게 찾아왔다.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무언가를 너무 많이 해버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너무’ 그랬던 것 같다.
그때 내 앞에 놓인 시험은 끝없는 경쟁이었다. 앞서가는 사람을 끊임없이 쫓아야 했고, 뒤쫓아오는 이들에게는 결코 따라잡혀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하루하루를 다그치며, 내 전부를 태워가며 달려야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면 컨디션 조절을 못한 스스로를 탓했다. 한 번은 몸살이 심해져 수액을 맞고도, 병원에 있는 동안 공부하지 못한 시간이 아깝다며 다시 임용시험 준비실로 향했던 적이 있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기숙사로 돌아와 기절하듯 쓰러져 잠든 날도 있었다.
적절함을 가늠하는 감각은 희미해지고, 어느새 실체 없는 ‘완벽함’이라는 그림자가 나의 비교 대상이 되어버렸다. 불안과 결핍, 강박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닌 무언가로 너무 열심히 살았다.
다 소진된 채로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보냈다. 조급한 마음에 몇십 번을 시도해봐도,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만큼의 에너지를 앞으로 당겨 써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렇게 멈춘 뒤에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달려왔던 걸까. 무엇을 위한 전력질주였을까. 무엇과 싸우고, 무엇에 이기려 했던 것일까. 그런 질문들 속에서 멈춰 서서 오랜 시간을 쉬었다. 그리고 ‘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쉰다는 것은 외부 세계에 노출시키던 자신을 다시 거둬들이는 것.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거두고, 성과의 압박에서 나를 거두고, 완벽함이라는 허상에서 나를 거두고, 그리하여 본래의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시간.
생각해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온전히 쉰 적이 언제였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쉼 없이 달려왔던 사람치고는 꽤 멀리도 왔다 싶은 안쓰러운 기분도 들었다.
스스로와 화해하는 마음으로 이번만큼은 잘 쉬어보기로 했다. 잘 먹고, 충분히 자고, 억지로 미뤄두었던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의무가 아닌 즐거움에 마음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인간은 쉬어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떤 성과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쉼’은 오히려 휴식을 또 다른 스트레스로 만들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에.
몸과 마음은 조금씩 회복되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다시금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무사히, 그리고 끝까지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
회복의 시간 동안 정말 귀한 것을 배웠다.
이제는 교사가 되어, 상담하러 온 학부모님께 한번씩 묻곤 한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잘 쉬고 있는지. 쉼이 단지 멈춤이 아닌 회복의 시간임을 알고 있는지. 오늘을 살며 내일을 품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때를 돌아보며 나 자신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무리한 열정보다 여유 있는 몰입이 더 필요하다. 타인의 속도가 아닌, 자신과 세계가 연결된 리듬을 조율해 가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결국 좋은 삶이란 균형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몰입과 탈진 사이, 열정과 무기력 사이, 과도함과 모자람 사이에서 나를 잃지 않고 나아가는 삶.
문득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떠올랐다. 그는 덕(arete)이란 감정과 행동을 ‘적절한 방식으로,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로, 적절한 정도로’ 실현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중용’의 핵심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느린 지혜일 것이다.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건강하게 오래 이어가기 위한 지혜.
과열된 자기 계발과 무한 경쟁의 시대 속에서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세우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본다. 그 안에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오래 걸어가길 바란다. 스스로를 향한 너그러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마음 다해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