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은 존재를, 대화는 존재의 표현을 향한다.
거의 매년 있는 일이다.
체육대회를 앞두고 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나뉘곤 한다.
한 무리는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뚜렷한 학생들로 모인다.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을 쪼개 연습하고, 방과후에도 작전을 세우며, 모두가 하나 되어 움직이는 단합과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 원하는 아이들. 다른 무리는 함께하는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학생들이 모인다. 잘하고 못하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위를 점하고 싶은 종목이 있다기보다는 골고루 출전하고, 그 안에서 나누는 웃음과 격려, 흐트러짐 속의 여유가 더 소중한 아이들.
보통의 경우처럼 나도 담임반 아이들이 이기면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곤 했다. 때문에 경기장 밖에 서서 지켜보면서 아이들이 한 발 더 움직여주길 바랐고, 더 집중하길 바랐다. 그렇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실력은 사실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다. 성에 차지 않는 모습에 대해서, 반에 도움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경기가 끝나면 필연적으로 지는 반이 생기고, '때문에'라는 단어와 가혹한 말들이 여기저기 따라붙는다. 자책하는 친구의 속을 헤집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것이 얼마나 날카로울 수 있는지 잘 모르는 아이들의 표현이 낸 생채기가 참 오래 간다. 오죽하면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며, 올해는 특정 종목에 아이가 출전하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는 말을 학부모 상담에서 듣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금에 와서는 어떤 경쟁활동도 몸과 마음 다치지 말고, 그저 추억 하나 남기자는 쪽에 가까운 편이다. 하지만 막상 열심히 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 열정이 빛나 보인다. 무릎 쓸려가며 온 힘을 다해 뛰는 아이들을 마음껏 응원해주고 싶었다. 때문에 과열 양상에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자 지도해야 할 때에도, 혹시나 아이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들릴까봐 표현을 조심하기도 했다. 담임인 나 조차도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체육대회를 맞이한다.
담임으로서 바라는 이상은 각자의 가치관을 가진 아이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반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이다. '이기자'는 열정이 반 분위기에 활력을 주는 동시에, '즐겁게 하자'는 마음이 모든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따뜻한 장을 만들어 주는 것.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경쟁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늘 당부한다.
"서로 격려해주자. 친구가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실력인거야. 심판의 판정에 따르고, 누구에게도 상처주는 표현은 하지 말자. 그리고 경기 결과가 어떻든 우리 반이 끝까지 서로를 응원해주는 모습이 가장 멋진 장면이 될 거야."
하지만 경험상, 이런 바람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특정 학생들의 태도나 개인적 문제라기보다, 경쟁이 가진 구조적 성격 때문이다. 순위와 승패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무대에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비교하게 되고 자존심을 내건다. 반 대항이라는 집단 구도에서 '우리'라는 소속감과 함께 때로는 상대 반을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도 피어나기 쉬워진다. 또, 승리 외의 다른 가치를 드러낼 장치가 부족하면 결국 '이겼냐, 졌냐'가 최종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균형을 잡기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체육대회 종목들을 연습하는 동안 그런 모습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씩 오해가 쌓여간다. 땀은 닦아내도, 조용한 긴장은 계속 흐른다. 갈등이 고조된다. 처음엔 작은 단어들로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조금 지나면 감정이 담긴 어떤 문장들이 허공에 부유하기 시작한다. 딱히 얼굴을 보고 나누는 말은 아니다. 좀 들으라는 식으로, 수신자가 누군지는 추측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말. 문제로 불거지면 불리하기에, 애매하게 공기 중으로 뱉는 말들이 툭툭 흘러나온다.
"아, 조금만 더 집중하지?"
시선이, 감정이 오고 간다.
그에 대한 대답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힘든 시간이 흐른 후에 피어오르는 또 하나의 문장.
"왜 이렇게 심각하고 난리야?"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라는 식의 그 말 속에, 분명히 담긴 날 선 감정이 있다.
반응들이 부딪히고, 미묘한 눈빛이 오가고, 무리지어 모인 학생들끼리의 웃음, 그리고 비웃음.
그렇게 참지 못한 아이의 험한 말이 기어이 쏟아진다.
"아, 씨발—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웃는건데."
욕설, 정적,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그 표현에는 단순한 비속어 이상으로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애써왔던 시간, 기대했던 협력, 그리고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함까지.
그 깊이는 다를 수 있겠지만, 해마다 이런 패턴은 늘 반복되는 종류의 것이다.
갈등이 심화되자 아이들이 결국 담임인 나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두 무리의 대표격인 아이들과 상담의 시간을 가졌다. 난처했다. 어느 쪽의 마음도 틀린 것이 아니니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해 각자는 최선을 다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오히려 인정할 수 없는 상대방의 감정이 서운함이 되고, 미움이 되고, 가득 쌓여가는 불만이 되고, 결국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니까.
물론 참지 못해 욕설을 내뱉은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하지만 이런 상담을 할 때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서둘러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 더 노력한다. 아이들도 오죽 답답했으면, 나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니까. 그래서 결코 쉬운 말로 종결해버리고 보낼 수는 없다. 이렇게 모이는 시간이 지니는 가치는, 허공에 떠도는 말과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상대에게 올곧게 말할 수 있는 자리로서 의미를 갖는다.
타인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각자의 마음, 곧 자기 자신이 답인 감정을 먼저 물어보며 말의 물꼬를 트는 편이다. 아이들은 서로 자신의 입장—즉 주로 억울하거나 서운하거나 화가 나거나, 기분 나빴거나, 원하는 것—에 대해서 정식으로 이야기할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찬찬히 들으면서 그 지점에서 자신이 느꼈던 생각과 의견을 말한다.
한쪽에서 말했다. 우리가 이기고 싶어서 노력하는 걸 가볍게 여긴 것 같다고. 힘들게 모두가 참여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웃는 모습이 속상했다고. 다른 쪽에서 말했다. 억지로 시키는 분위기가 불편했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 같은 느낌도 싫었으며, 그저 함께하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모두가 너희와 같은 마음일 순 없다고.
허공에 흩뿌려졌던 비난은 이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이 잘못했다 여기는 부분을 지적하면서도, 끝내 서로의 입장을 고려해볼 수 있는 시작점으로서의 대화로 모습이 바뀌게 된다. 나는 그저 아이들이 하는 말들을 따라가며, 어느 지점에서 마음이 상했을지, 상대방이 이해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일지를 짚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느 정도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보이면, 그제서야 마지막에 내 마음을 덧붙여 마무리한다.
"우리가 서로 다른 마음으로 임해왔다는 걸 안다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상대방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누구 하나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어. 가치관을 가진 '사람' 자체를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거야. 선생님이 너희와 모든 순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다 알 수 없어. 그렇지만 너희는 스스로가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 잘 알고 있을거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과 표현을 했다면, 그런 행동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거야. 선생님의 말을 듣고 너희 각자의 마음에 상대방을 향한 미안한 감정이 들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정말 대단한 사람이기도 해. 그리고 그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이 가진 그릇의 크기이기도 하고. 너희가 그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온 그 자리에서, 당장 눈에 띄는 사과는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감정이 풀리지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서운하고 싫은 마음을 다 꺼내놓는 대화의 방식이 갈등을 더 깊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 속에, 다른 오해가 끼어있지 않기를 바랐다. 비난을 하더라도,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하더라도,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미워하지 않기 바랐다. 각자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은 가치관의 다름에서 비롯된 어떤 행동이나 표현에 있다는 사실을, 그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기를 바랐다. 상대방의 전체가 아닌, 그 부분만 미워하길 바랐다. 그리고 담임인 내가 그 역할을 잘 했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그들의 갈등이 곧바로 풀리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오해가 심화되는 것을 멈출 수는 있으니까.
우리는 종종 사람을 미워하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아닌 그의 방식이 우리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은 잊곤 한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그 사람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내 감정을 다루기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또는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비난해야만 내 상처의 깊이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의 비난은 존재를 향하고, 대화는 존재의 표현을 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학년, 같은 반에서 모여서 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그것을 배우는 중이다. 하나의 반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갖는 건 아니라는 것을. 싫은 사람들과도 집단을 이루며 잠시 지내야 할 때가 있고, 그 와중에도 서로 예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다름은, 정확히 짚고 넘어갈 때 비로소 덜 아프게 지나간다는 것을. 아이들은 그렇게 관계 맺기의 방식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런 배움의 자리, 서로의 다름 사이에, 나는 한 명의 교사로 서 있다.
갈등 상황에서 교사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상황을 정리하고 해결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복잡한 마음들이 엉켜 있는 자리에서 실타래를 풀어낼 작은 힌트를 건네는 사람. 누구의 말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각자의 마음이 제자리에서 만나게 도와주는 사람. 그렇지만 나는 지금의 방식이 과연 맞는지, 혹시 무언가 더 해줄 수 있었던 건 아닌지를 늘 고민하게 된다.
결국 교실 또한 관계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아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더 오해하지 않고 함께하는 시간을 지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그 마음이 다시 닿을 수 있도록.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설령 거기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돌아보니 그 친구도 나름의 입장이 있었겠다고 이해하며, 삐져나온 실타래의 끝을 매듭지을 수 있도록. 그리고 아이들이 언젠가 다른 이와 겪을지 모르는 비슷한 갈등에서는,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존재를 대할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그 사이에서 각자가 서로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런저런 질문들을 슬쩍 던지며, 언제 싹을 틔울지 모를 하나의 씨앗을 심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