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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Dec 17. 2023

군인 갤러리 3화

육군훈련소

나는 2003년 1월 육군훈련소를 다시 찾는다. 이제는 긴장 역력한 다른 동기들의 표정이 다 보였다. 나는 인생 2막. 훈련소를 재입대한 사람이니까. 여유가 넘쳤다. 긴장 대신 웃음이 만연했다. 10월 처음 입대에 비해 무척이나 추워진 날씨였으나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훈련소 생활이 녹록치 않았다. 나는 30연대였다. 홈페이지를 지금 들어가보니 훈련병들 사진도 게시되어 있고, 부모나 친구가 인터넷 편지도 쓸 수 있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같다.

발전한 육군훈련소 30연대 홈페이지

아래와 같은 내무실(지금은 생활관)이 그때는 다였고, 지금은 극히 일부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한 방에 8명 정도 잘 수 있게 침대형으로 되어 있다. 활동복 색깔도 정확히 이랬다. 일명 떡볶이라고 불리는 오렌지색 활동복을 지급받았고, 남색 활동복은 그전 색으로 짬의 상징(?)이었던 시기다.

그 당시 내무실 환경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는 여수 출신 민철이와 동희가 내 전우조였고 훈련받을 때 항상 같이 다녔다. 지금은 한국군 전투화가 너무 좋아져서 받아서 신으면 되지만 그때는 발뒤꿈치가 까지는게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불침번이 거꾸로 꺼내놓은 전투화를 밟고 다니는 일도 했다(전투화 연화작업). 훈련소에서의 된장국은 우리가 그 색깔 때문에 국이라고 불렀었다. 된장국에 밥을 엄청 많이 먹어도 돌아서면 꼬르륵 소리가 났다. 또한 훈련장도 5~10km 이상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학과출장(교육기관에서 교육훈련을 받으러 나가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행군이고 훈련이었다. 수류탄 교장은 그 중에서 가장 멀고 연습용이 아닌 실제 수류탄을 호수에 던지고 몇초 후 대지가 울리는 경험을 난생 처음 한다. 훈련을 받고 복귀하는 길에 군가를 부르는데 추임새로 "어머니~~!"를 부르는 군가가 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모두 울었다. 보고싶어서. 그 땐 모두 효자가 된다. 가장 힘들어서 잡생각을 할 수조차 없을 때 비로소 소중한 우리 부모님을 떠올린다. 가장 마지막 순위에.

제일 힘들었던 훈련은 한겨울 날씨에 내복도 입지 않고 CS복(민무늬 국방색으로 얼룩무늬 이전 전투복이며 흙과 먼지가 많이 묻는 훈련시 사용하는 훈련복)만 입고 숙영을 나간 일이었다. 훈련소 기간이 5주로 줄어든 이후에는 숙영이 없어졌다고 한다. 전우조 세 명이 짝을 지어 텐트와 군장을 메고 행군을 가서 각개전투와 같은 훈련을 받고 야외에서 자는 훈련이었다. 어머니가 손편지도 많이 써주셔서 힘든 6주를 버텼다. 하지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역시, 불가능한 환경에서 카투사로 생활할 수 있게 된 사건이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하심을 믿는 신앙의 큰 성장이 있었다.

어느새 혹독했던 훈련이 끝나고 이등병 계급장을 가슴에 달았다.


이제 KTA다.






첫 화

https://brunch.co.kr/@magne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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