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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Jan 10. 2024

새해 노브라로 집을 나섰다

「이까짓 거!」 박현주 그림책

여섯 시쯤 눈을 뜨면  일단 잠옷만 갈아입은 채 스트레칭도 하고 책도 읽고, 브런치도 기웃거린다. 아침 준비를 하며 짧고 굵게 집안인을 해치우고 아이가 등교하는 8시쯤 오늘도 걷자며 집을 나선다. 차림은 간단하다. 질끈 묶은 머리에 야구 모자 하나 덮어쓰고, 이미 갈아입은 트레이닝복에 롱패딩을 걸치면 끝. 다만 노브라로 잠을 자니 현관문을 나서려면 입고 있던 상의에서 두 팔을 빼내어 브래지어를 한 후 다시 옷을 입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늘 있다.


그날도 내 몸에 문신처럼 브래지어를 착용하던 순간. 불쑥 궁금해졌다. 왜 꼭 입어야 하지? 혼자 걷다 뛰다 걷다 그게 다인데 누구를 위해 입는 걸까?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속옷을 생략한 채 겉옷을 걸치고 꼼꼼하게 여몄다. 패딩이 두툼하니 티도 안 난다. 운동화를 신고 빠르게 걷다 부러 뛰어도 본다. '어라?' 아줌마의 가슴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내 가슴에는 나만 관심이 있을 뿐. 낯선 개운함과 통쾌함마저 드는 아침이었다. 돌아오는 길엔 태연히 동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계산원과 눈맞춤하며 이야기까지 나눴다는 거 아닌가.(하하)



'노브라'로 외출한 것은 30여 년 만에 처음이다. 잠을 자다 혹시 불이라도 나면 브래지어는 입고 뛰쳐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나와 브라는 한 몸이었다. 40이 넘도록 노브라로 집 밖을 나서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는 말이다.  나는 왜 여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에도, 혼자 걷기 운동을 하러 나서는 순간에도 과감히 벗어던질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얼굴에 물만 묻힌 채 모자 하나 눌러쓰고 동네를 돌아다닌 날도 허다하면서 보이지도 않는 가슴은 왜 그리 꽁꽁 동여맸던지.



당연하다 여기고 살았던 일, 익숙한 상황, 편한 사람들에 길들여져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에 자주 머뭇거린다. 하던 대로 하고 잘할 수 있는 것만 꾀하고, 먹던 것만 먹고, 만나던 사람만 만난다. 한 번 도전해 볼까? 하다가도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어떡해. 내 실력으로 무슨‘하며 쪼그라든다. 쪼그라드는 마음은 낯선 향의 음식을 맛보는 하찮은 일부터 새로운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려야 하는 일상생활, 새로운 일거리를 찾는 시도, 미래를 계획하는 거시적인 일에까지 수시로 작용해 주저하게 만든다. 브런치의 발행 버튼을 누르는 일도 그러하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예민해 새로운 환경은 적절히 차단하며 지냈다. 그런데 브래지어를 벗어던진 행동에서 뜻밖에 용기가 생겼다. '이까짓 거!' 별거 아니네 하고.






나와 비슷한 아이를 그림책에서 만났다. 박현주 작가의 <이까짓 거!>


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하교 후 비가 오는 어느 날, 여자아이는 우산이 없다. 같이 가자는 이웃어른의 말에도 엄마가 오실 거라며 거짓말을 한다. 우산을 쓰고 하나둘 떠나는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하다. 이때 만난 '홍준호'.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다. 준호는 머리 위에 가방을 올린 채 무심히 말한다. "넌 안 가냐?" 빗속으로 냅다 뛰어나가는 준호를 바라보다 여자아이도 따라 뛰기 시작한다. 둘은 게임하듯 문방구까지 편의점까지 분식집까지 경주를 하며 힘껏 달린다.



피아노 학원에 도착해 준호가 가버린 후 다시 혼자 남겨진 아이.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심한 듯 빗속으로 뛰어든다. 머리 위에 가방도 올리지 않은 채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달린다. 회색빛이던 하늘은 조금씩 밝게 물들고 아이의 표정은 한층 신이 난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진다. '정말 괜찮아요. 이까짓 거!'

탁탁탁 빗방울에 튀기는 경쾌한 발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오지도 않을 엄마가 올 거라며 거짓말하는 아이 모습에서 용기 내어 누군가에게 도와달라 말하지 못하던, 타인의 친절도 의심하고 경계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한참 머물렀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뛰어 본 적 없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아이가 두려움을 딛고 빗속으로 뛰어들 땐 나도 함께 비를 맞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올 한 해 나도 다 괜찮을 것만 같은 마음. 내리는 비를 겁내지 않고 다 맞아볼 용기가 슬금슬금 생긴다.


거창한 새해 계획 하나 없이 무심코 보던 그림책에서

 2024년 나의 키워드를 찾다니.

‘이까짓 거!' 나직하게 중얼거려 본다.




<함께 읽으면 좋은 그림책>

「빨간 벽」(브리타 테켄트럽/봄봄출판사)

「문 밖에 사자가 있다」(윤아해 글, 조원희 그림/뜨인돌)

「행복한 세세 씨」(김수완 글, 김수빈 그림/옐로스톤)






사진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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