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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워리 Mar 14. 2022

소매치기를 당할 뻔 했다

나의 첫 유럽여행 회상기 06







  베를린에서의 두 번째 날 아침이 밝았다. 아니, 밝지 않았다. 아침부터 꾸물꾸물 먹구름이 가득이었다. 그래도, 전날 바라보았던 브란덴부르크문의 야경에 취해 기분 좋은 상태로 잠에 들었고, 오늘은 또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지 잔뜩 기대하며 숙소를 나섰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보기 위해 베를린 동역에서 내렸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동독과 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뒤에, 예술가들이 모여 이곳에 평화를 상징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유명해진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야외 갤러리로서, 베를린에서 꼭 가봐야 할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총길이 약 1.5km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한다면 아마도 다리가 꽤 아플 수 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가장 유명한 <형제의 키스>



  장벽 옆으로는 슈프레 강이 흐르고 있다. 서울의 한강처럼, 베를린 시를 관통하는 강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걸어갈 수 있을만한 거리는 최대한 걸어 다녔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른 나라라서 그런가 유럽 하면 떠오르는 옛 건축물의 모습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현대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선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니 당시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동유럽에서는 유심칩을 구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데이터를 쓸 수 없었고, 미리 공부해 간 종이지도와 길가에 그려진 이정표에 의지해서 돌아다녔다. 인터넷이 안 되는 관계로 궁금한 건물들이 있어도 검색을 하지 못했고, 길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감에 의지해서 걸어 다녔다. 지금은 구글맵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베를린 돔과 tv타워



  베를린 대성당(Berliner Dom)에 도착했다. 구글맵이 없어도 됐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옆에 보이는 뾰족한 TV타워가 이정표 역할을 해 주었던 까닭이다. 베를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탑은, 동독 때 완공되어 방송 송수신탑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나 현재는 전망대와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베를린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쾰른 대성당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웅장 하다기보단, 부드러운 곡선의 둥근 지붕이 돋보였다. 넓은 잔디밭과 분수가 어우러져 시민들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공원처럼 편한 분위기였다. 비가 와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도 다녀왔다.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주변의 주택가, 상점들 사이에 공원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이곳은 무려 2711개의 전부 다른 크기의 돌이 놓여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관들이 놓여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공원의 중앙부로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렇게, 비 오는 베를린에서의 여행은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루 만에 베를린 한 바퀴를 전부 돌아보았다. 전날 야경을 봤던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다시 섰다. 미스트처럼 흩뿌려지던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고, 지금까지 후드 집업에 달린 모자로 버티던 나는 결국 우산을 사러 기념품점으로 들어갔다. I ♡ BERLIN 이 써져있는 3단 우산을 10유로에 샀다.



  관광객 티가 너무 나는 촌스러운 우산 때문이었을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 오던 백인 소년 2명이 내게 다가와 종이 뭉치와 펜을 주면서 서명을 부탁했다. 나는 단번에 소매치기 수법임을 알아차렸고, NO라고 말하며 가볍게 지나쳤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 걸어가는 동양인 여자를 너무나도 얕본 것인지, 양 옆으로 달라붙어 따라왔다. 한 명이 팔짱을 끼며 대놓고 주머니를 뒤졌다. 심지어 "너 중국인이지?"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확 뿌리치며 지금 뭐 하는 거냐 소리치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주머니를 뒤지던 놈이랑 실랑이하는 동안, 나머지 한 명은 옆으로 메고 있던 내 가방을 뒤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죽을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다급하고 무서웠다.



  어떻게 이런 벌건 대낮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큰 도로변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았고, 그들은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았다. 행복하기만 했던 여행 중에 처음 겪어보는 분노와 모멸감이었다. 만약 걔네들이 소년이 아니고 건장한 남성이었다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상상이 되질 않아 더 무서웠다. 그 후로 나는 핸드폰과 지갑을 비롯한 소지품 관리를 아주 철저하게 했고, 인적이 드문 곳은 피해다녔다.



  얼른 독일을 떠나고 싶어졌다.



국회의사당



  걷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으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걸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하늘은 맑게 개고 있었다. 정말 얄미울 만큼 맑은 하늘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느지막이 오후에 나올 걸. 뭐가 그리 바쁘다고 흐리고 비 오는 오전부터 바쁘게 돌아다녔던 건지. 가보기로 했던 모든 곳은 다 갔지만 남은 건 아픈 다리와 짜증스러운 마음이었다.


  망할 I ♡ BERLIN 우산!


 국회의사당에서 휘날리는 독일 국기를 몇 분 간 바라보다 숙소로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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