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하면 좋은점, 많이 울 수 있다

by 김지은

꿈에 그리던 독립을 어쩌다보니 서른다섯에 했다. 나이는 먹어도 독립은 처음이라 새롭고 신선하게 마주하는 일들이 하나하나 버겁기도하고 어렵기도하고 그래도 해나갔는데, 여러가지 장단점이 존재하고 단점들은 내 경험치가 되고 익숙함이 되었다. 조금 더 부지런하면 단점들도 내가 잘 다루게 된다.


독립은 자유 그리고 안정 그 자체다. 이 세상에 빌붙을데도, 내 발치 하나 서있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게 세상인데 내 발치 정도 온전히 마음껏 서있든 눕든 앉든 상관없는 게 바로 내 집 공간이라는 것이 매번 감사하다. 내가 있어도 되는 공간, 그 정직함.


전에 살던 본가는 내가 나이도 있고 미혼이다보니 부모의 눈치를 많이 봤다. 정말 좋아했던 집이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내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어서 항상 마음이 젖은 담요마냥 눅눅하고 내 몸을 누이는 게 조금 눈치도 보이고 그래서 더 밝게 귀여운 딸 노릇을 했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보면 부자연스러운 것이지. 그 필사적인 '있고싶음을 어필'하는 게 너무 구질구질하고 슬프다. 나를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나는 너무 구질구질해지고 불쌍하고 슬퍼진다.


가족이라하더라도 애정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기때문에 서로서로 자신의 영역을 다투기도하고 눈치를 보기도하고 무언중에 기분나쁜 기운을 뿜기도 한다. 나는 가족이 불편했던 것 같다. 혹은 내가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다. 그게 좀 슬프다.


독립을 한 계기도 가족과의 문제였다. 꽤 큰 일이 벌어져서 나는 쫓기듯이 나오게 되었고 그건 내 마음이 큰 상처가 되고 심리상담도 다녔었다. 망가진 마음을 추스르고 치유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했던 건 돈을 주고서라도 내 마음을 이해해줄 누군가였다. 그래서 상담을 찾았고 매우 도움이 되었다. 가족도, 애인도 그 누구도 정말 어려움 앞에서는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냥 위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내 부서진 마음은 나만이 주워담을 수 있었고 주워담는 동안 주변인들은 그저 땅을 보거나, 하늘을 보거나, 등을 돌리고 있거나, 민망해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내가 바란 건 내 망가진 마음 주워담는 날 바라보고 좀 더 용기가 난다면 다가와서 안아줬음했다. 같이 내 마음을 주워주었음 했다. 큰 일이 벌어지고 나서 느낀 건 너무 절절한 외로움이었다. 나를 지키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나밖에 없어. 이걸 구걸할수도 없어.


수시로 마음은 쏟아졌고 나는 다시 잘게 부서진 마음을 주워담고 주워담는 과정에서도 또 다시 가슴에서 마음은 쏟아져 땅으로 떨어졌다. 다시 파편을 주워모으고. 그 과정이 거의 1년동안 지속되었다.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도 잊혀지지도 아물지도 않았다. 쏟아지고, 쏟아지고, 쏟아지고.


우선은 내 공간으로 피했다. 집을 알아보고 대출을 받고 내 집으로 모든 걸 다 이동했다. 내가 싫어했던 집이라면 모르겠는데 내가 좋아하던 집에서 이리 떨어지니 마음이 더 괴로웠다. 나는 내 집에서 가만히 앉아 수시로 마음을 쏟아뜨리고 울었다. 만화책을 보다가도 울고, 티비를 보다가도 울고, 자신의 자녀를 보물이라 칭하는 그 말에 치여 또 울었다. 아마 밥을 먹는 횟수보다 더 자주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밥을 먹듯이, 잠을 자듯이 나는 주기적으로 울었다. 그냥 소리없이 내리는 눈물이 아니라 매번 펑펑, 엉엉, 으아아앙 울었다. 휴지로 양쪽 눈을 틀어막고 으아앙 울어만 댔다. 그냥 울어야만 했다. 그게 내 중요한 치유방법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마음을 녹여야했다. 이대로 굳어버리면 쉬어버리고 썩어버릴 것 같았다. 얼른 썩기 전에 마음을 눈물로 녹여 비워야했다. 그래서 수시로 그대로 주저앉아 많이 울고 또 울었다.


가족이랑 살때는 회사문제든 다른 문제든 연애문제든 울고싶을때 울 수 없었다. 샤워를 하러가서 울거나 그런데 그때쯤이면 타이밍이 안 맞아서 눈물이 안 나와서 어정쩡했고, 연기자도 아니고 갑자기 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울음을 터뜨릴만한 타이밍을 절대 찾을 수 없었는데, 혼자 사니 좋은 건 울고 싶을 때 펑펑 울 수가 있는 것이다. 자다가 슬픈 나를 위로하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와서 엉엉 울며 깨도 쳐다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더 울어도 상관없다. 설거지하다가 울든, 빨래를 널다가 울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울기시작하면 내 고양이가 다가와서 나를 본다. 그게 미안해서 코푼거라고 얼른 변명한다.


하나 미안한 건, '그 일'이 본가에서 있었을때 내 고양이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내가 낸 소리를 들었을까? 내가 잔뜩 화가 나서 지르는 소리들, 악몽같은 그 처절한 시간들을 내 고양이도 느꼈겠지. 내 고양이는 그 때 어디에 있었을까. 아마 숨어있었을텐데. 내 마음이 우선이라 내 고양이를 신경쓰지 못한 게 너무 슬프다. 그래서인지 내 고양이는 아직도 내가 혼자 운다 싶거나 코를 훌쩍이면 얼른 다가와 나를 살핀다. 내가 하나 눈치보는 건 내 고양이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주 울고 싶을 땐 운다. 소리내어 시원하게 울고 마음을 말린다. 다행히 요즘은 잘 울지 않는다. 기껏해야 최근에 귀칼보고 영화관에서 운 정도? 울 수 있을 때 잔뜩 울면서 슬픔을 달래고 마음을 게워낸 탓인지 마음이 꽤 뽀송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울고싶으면 울거고 또 한 번 울 때 시원하게 울 것이다. 더 이상 울음을 참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독립 후 겨울왕국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