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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Jan 09. 2024

단식 여덟째 날

채식의 미(味)

단식을 하고 싶었던 마지막 이유는 미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보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였다. 육식을 줄이기로 마음먹고 여러 가지 채소를 맛보면서, 사찰 요리를 배우면서 점점 깨달았다. 야채의 미(味)는 정말 다채롭구나. 야채에는 단 맛, 신 맛, 쓴 맛, 매운 맛, 쌉싸름한 맛, 알싸한 맛, 떫은 맛, 고소한 맛 등 여러 맛이 있었다. 조미료에 길들여져 있던 내 혀가 마비가 풀리고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자극적인 음식을 줄여나가기 시작하니, 좋은 땅에서 자란 야채와 하우스에서 비료를 먹고 자란 야채의 맛도 구분되기 시작했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맛'을 강화시켜 곤충들을 퇴치한다. 양파의 매운 맛은 '알리신'이라는 성분 때문이고, 시금치의 알싸한 맛은 '옥살산'이라는 방어물질이라고 한다. 박하의 코를 찌르는 화한 향은 곤충들이 싫어하는 향이다. 꽃들은 저마다의 향을 내뿜어 익충을 끌어들이고, 해충을 퇴치한다.


이런 이유로 스마트팜에서 안전하게 자란 상추는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없고 맹맹한 맛이었다고 누군가가 경험을 공유해 주었다. 바람도 비도 천적도 없는 안전한 환경에서 양분을 모두 공급해 주니, 링거를 맞고 누워있는 사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건강한 식물은 땅에서 주변 환경과 함께 어우러지며 성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기농 밭에서 자란 부추는 향이 매우 강했다. 노지딸기는 새콤한 맛이 폭발했다. 당근은 원래 그렇게 단 맛이 나는지 몰랐다. 엄마가 어렸을 적 먹어본 당근 맛이라고 했다. 재료 본연의 맛만으로도 요리가 가능했다.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나니, 나는 얼마나 안 좋은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는지 실감이 났다.


소란 선생님이 진행하는 단식 프로그램은 어언 10년 차인데, 매년 참가하는 사람들의 소감이 인상 깊었다. 작년 단식 후 회복식 때 고구마를 먹던 밭 동료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맛있다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복 후 고춧가루가 살짝 묻은 김치를 먹은 것만으로도 속이 불타는 느낌이 들었다던 밭 동료도 있었다. 매운 맛을 즐겨 먹는 한국인이 위장병이 많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도 단식 후 조금씩 먹는 음식의 소중한 맛들을 꼭 기억하고 싶었다.




단식 8일 차, 보식 2일 차.

또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원래라면 남편과 수영을 가야 하는 날인데, 아직 힘이 나지 않아서 못 갈 것 같다. 대신 어제 밀린 일기를 썼다. 남편이 수영에서 돌아온 후 함께 아침을 먹었다.

보식 2일 차 아침


아침은 어제 남은 미음 반 공기, 물김치 국물 조금.

오늘부턴 죽에 간을 해도 된단다. 기쁜 마음으로 소금을 넣었다. 이제 좀 먹을만하다. 물김치 국물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염분이 들어가니 확실히 힘이 나는 기분이 든다. 힘이 없을 땐 의지도 없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기운이 올라오니 기분도 좋아진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선지 다시 쪽잠을 잤다.


먹고 싶은 게 참 많다. 사찰음식 중급반에서 보던 책을 펼쳤다. 얼큰된장수제비, 오이만두, 연근두부완자튀김, 우엉잡채, 버섯탕탕이찌개. 페이지 끝을 접어두었다. 단식 끝나면 이거 다 해먹어야지. 요리에 대한 의욕이 타올랐다. 수료하지 못했던 사찰음식 고급반도 듣고 싶어졌다. 사찰 다식 만들기 일일 클래스를 신청해 버렸다. 자연과 가까이 살며 건강한 음식이 완전히 내 삶이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렇잖아도 회복식 마지막쯤 되면 다양한 자연식물식을 먹을 수가 있으니, 요리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사흘 후 배송 오는 어글리어스 채소박스에 품목을 추가했다. 제주 유기농 당근도 한 박스 주문했다. 그리고도 또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으려다가 너무 많이 사는 것 같아 취소했다.


사찰요리 수업 중에 만든 요리


사찰 요리는 비건 요리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주로 해외에서 비건 인구가 많아 서양식 비건 요리가 많이 전파되지만, 사실 우리나라 전통 음식 중에 살펴보면 비건인 것이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도 동양의 발효 음식은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며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만큼, 발효 음식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 실제로 나는 사찰음식에 관심이 있어서 사찰음식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때도 스님은 직접 담근 장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화학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수제 장류는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 또한 설탕이 아닌 만든 조청을 주로 사용하였고, 시판 튀김가루가 아니라 밀가루와 전분가루를 섞어 튀김을 만드는 등, 모든 과정이 정성이었다. 2021년에는 사찰음식이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런던캠퍼스의 정규 교육과정으로도 들어갔다. 주로 기름에 볶거나 굽는 서양식 요리와 달리 사찰 요리는 삶거나 찌는 요리가 대부분인 데다가 발효 음식과의 조합으로 더욱 건강한 식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단식 기간에도 두륜산 산야초로 만든 효소액을 물에 희석해서 틈틈이 마셨다. 1년 간의 발효과정을 거쳤으니, 좋은 미생물이 많이 생겨 장의 활동을 좋게 해 준다. 3년 이상 된 효소를 구할 수 있다면 더 좋다. 효소 단식은 저혈압이나 빈혈이 있는 사람 또는 활동량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단식법이라고 한다. 실제로 공복감이 많이 느껴질 때 효소차를 마시면, 공복감이 줄어들었다. 유기농 설탕과 함께 발효되었으니, 달달한 맛도 좋다. 단식을 하며 달달한 과일이 많이 생각났는데, 효소차를 마실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보식 2일 차 점심


점심은 묽은 죽 3/5 공기, 물김치 국물, 된장 국물.

염분도 조금씩 늘려가야 탈이 나지 않으니, 보식 이틀 차가 되어서야 드디어 된장 국물을 먹을 수가 있었다. 남편이 요리할 때 풍기던 된장 냄새가 어찌나 힘들었는지. 어릴 때부터 나는 편식이 심했지만 된장국에 김치만 있으면 밥을 잘 먹었다. 된장은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한 줌 정도 되는 된장국물이 들어가니 가장 먼저 든 생각 '아, 살 것 같다..!!' 시골 된장의 구수하고 씁쓸한 맛이 좋다. 텀블러에 담아두고 마시고 싶다. 내일은 건더기도 넣어서 푹푹 떠먹어야겠다.


보식 2일 차 저녁


저녁은 묽은 죽 4/5 공기, 물김치 국물, 된장 국물.

된장국에 넣은 시래기도 몰래 한 줄기 넣어봤다. 원래 오늘까지는 국물만 먹으라던데, 지금 내 상태를 봐선 돌도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탈이 날 게 분명하니 조금씩만 도전해 봐야지.

애매하게 남은 죽도 다 끌어모아 거의 한 공기 같은 4/5 공기를 만들었다. 다 먹고 나니 무언가 과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가 부풀어 오르고, 약간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먹고 배가 부르다니. 위가 정말 많이 줄었나 보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된장 국물을 먹으니까 된장 건더기도 먹고 싶고, 김치도 먹고 싶고, 반찬도 먹고 싶다. 이래서 보식 기간이 가장 힘들다고 하나보다. 먹고 싶은 게 수두룩하게 떠오른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사람들이 질문을 올린다.


"견과류는 언제 먹을 수 있어요?"

"고구마는 언제 먹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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