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여행 Dec 28. 2023

잘 살고 있구나 느끼는 순간들

꼬깃꼬깃 접혀 나온 오천 원

짐을 이것저것 꾸리고 싸고 넣고 빼고, 버릴 것을 버리고, 정신없는 나날들 속에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하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아,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고 싶다."


그날은 저희 네 식구가 동네에서 외식을 하기로 한 날이었어요. 7년째 지내던 동네에서 떠날 날이 다가오자, 이곳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식당에서 밥을 먹자며 오랜만에 가족 외식의 날을 잡았답니다.


아이들 아빠가 퇴근을 하고, 모두 신나게 걸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왔어요. 메뉴판을 들고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시키던 차에, 갑자기 아들내미가 메뉴판을 집어 들더니 뒤적입니다. 곧이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오천 원 지폐 한 장을 꺼내며 말했어요.

"엄마, 이거 내 용돈꾸러미에서 가져왔어. 엄마, 이 돈으로 시원한 맥주 살 수 있어요?


유리잔으로 카스 한잔을 샀어요. 일 학년 아들내미가 사준 맥주. 엄마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서, 엄마의 혼잣말을 기억했다가, 외식 나오는 외투에  자신의 용돈을 꺼내 꼬깃꼬깃 접어온 그 마음을 마셔요. 방울방울 맺힌 시원한 맥주 거품이 목을 넘어가는데 뜨거움이 꿀꺽 삼켜져요.


아이들 자랑을 거의 하지 않지만, 제게도 분명 아이들 자랑을 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어요. 어려운 책을 읽는다거나 스스로 주도한 숙제를 잘 마친다거나 하는 순간들도 물론 기특하지만, 제 마음에는 다음 같은 순간들이 더욱 생생하게 각인되어요.


엄마가 혼자 말한 것을 기억했다가 마음 써주는 아이들,

밥을 다 먹으면 자신의 그릇을 가지고 설거지통에 잘 넣어주는 아이들,

엄마가 우울해 보이면 가만히 안아주고 가는 아이들,

엄마가 부르면 웃으며 대답해 주는 아이들,

차려준 밥을 먹고 늘 쌍따봉을 날려주며 고맙다고 말해주는 아이들,

늘 아이들을 다 준비시키고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나서는 엄마를 생각해서, 문이 닫히지 않게 작은 손으로 문을 꼭 잡아주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쓰는 작은 마음들을 엿보는 순간들,

아이가 정을 품고 따뜻한 안부를 나누는 사물과 동물과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들에게서 저는 자부심을 느껴요.


작은 아이들의 마음이 어른보다도 크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요. 이런 순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느껴요. 비록 수치화하여 나타낼 수는 없지만, 이 순간에 학업은 끼어있지 않지만, 이런 순간들로 우리는 잘 살고 있음을 역으로 깨닫게 되어요. 아이들도, 저도,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며 잘 살고 있구나... 하면서요.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저를 가득 채웁니다.

작가의 이전글 매일 행운을 저축하는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