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받아들고 나가려던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늘 듣던 인사였는데, 그날따라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내가 무슨 드라마 속 주인공도 아니고, 이런 말에 눈물이 나다니. 카페 직원에게는 버튼만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 콜라처럼 자동적인 인사였을 텐데 말이다. 사실, 최근 며칠 동안 좋은 하루는커녕, 그저 매일을 버티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붕 떠서 흔들리고, 사소한 일에도 ‘난 왜 이렇게 나약하지’ 하며 자책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가끔, 별 감흥 없던 드라마 속 대사나 단톡방에 올라온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릴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사소한 인사가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더니, 그날 나에게는 이 짧은 말이 뜻밖의 힘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걸 그냥 잊어버리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읽었던 김주환 교수의 회복탄력성이 떠올랐다. 책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사람의 내면을 다독이고,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더 잘 느끼게 해준다고 했다. 3주 동안만 실천해도 효과를 느낄 수 있다니, 한 번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그저 버티기만 하던 내 일상 속에서, 오늘 받은 인사처럼 사소한 행복을 찾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곧장 교보문고로 향했다. 따뜻한 베이지색 표지에 다이어리를 꼭 끌어안고 미소 짓는 여자가 그려진 노트를 골랐다. 귀여운 그림들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붙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얇은 심의 펜과 일기장에 어울리는 작은 스티커들까지 하나하나 고르다 보니, 감사 일기가 술술 써질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아직 쓰지 않았지만, 이미 한 페이지를 채운 듯, 설렘이 마음에 가득했다.
그런데 막상 책상에 앉으니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몰라 한참을 펜만 굴리며 고민했다. '일단 한 줄만 써보자'며 마음을 다잡아보았지만, 적을 말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내 일상 속에 감사할 일이 뭐가 이렇게 많을까 싶기도 했고, 억지로 감사를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결국, '다리에 감사하다', '공기에 감사하다'는 식으로 초등학생이 적을법한 억지스러운 감사부터 시작하게 됐다. 빈 일기장의 여백은 내 마음속 공허함과 닮아 있었고, 그 빈 공간이 나를 멈추게 했다. 하지만 '3주만 해보자'는 다짐이 나를 붙잡아 주었다. 어색했지만, 일단 그렇게라도 시작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한 마음에, '감사 일기 내용'이라고 검색해 봤다. 감사할 일을 적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아무튼, 친절한 인터넷이 알려준 대로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음에 감사합니다." "집이 있어 추위를 피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같은 조금은 식상하지만 기본적인 문장들을 적어봤다. 하지만 스스로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워 넣는 듯한, 불편하고 어색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적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지만,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일단은 그렇게라도 이어가 보기로 했다.
조금씩 쓰다 보니 억지스러운 감사를 적던 것도 점차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감사할 일인가?’ 하며 망설이던 순간들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날이 갈수록, 일상 속 사소한 일들에도 감사가 스며들며 조금씩 진심이 담기기 시작했다. 아이가 등교할 때 작은 손을 흔들며 “다녀올게요!”라고 외치는 모습이나, 오후의 조용한 시간을 채우는 따뜻한 햇살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아침 공기나, 아이가 책상에 놓고 간 귀여운 낙서까지도 미소 짓게 했다. 작은 일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기보다 마음이 점점 느슨해지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렇게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어느새 9개월이 되었다. 처음엔 억지로 끄적이던 감사들이 점점 진짜가 되어갔다. '이것도 감사할 일인가?' 하는 고민도 많았지만, 어느새 하루를 돌아볼 때마다 떠오르는 작은 감사들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누리고 있었는지, 감사 일기를 쓰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사소한 일에 쉽게 화가 나던 순간들도 점차 줄어들었다. 물론 내가 극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 된 건 아니다. 책에서 말한 회복탄력성이 눈에 띄게 커졌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감사 일기를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내 마음이 평온해졌고, 하루를 되돌아보며 작은 행복들을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늘 꾸준히 무언가를 이어가기 어려웠던 나에게, 중도에 포기할 줄 알았던 감사 일기는 유일하게 지속된 소중한 습관이 되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판기 콜라 같던 카페 직원의 인사는 이제 나에게, 일상 속 작은 감사들을 천천히 깨닫게 해주는 한 잔의 따뜻한 커피처럼 다가왔다. 그 짧은 인사처럼, 일상 속에서 발견한 작은 감사들이 오늘을 더 나은 하루로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