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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Nov 04. 2024

자기, 왜 이렇게 긴장해? 안 잡아먹어~

"여기, 인턴 새로 왔어요. 인사들 해~"



익숙한 환영 인사가 사무실에 울리자 사람들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짧게 인사하며 다시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 채 타이핑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가 다시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자주 반복되는 사소한 이벤트 같은 ‘인턴 환영식’에 처음 발을 들인 나는, 낯선 공간과 첫 직장의 어색함에 긴장감이 더 커지는 걸 느꼈다. 솔직히, 정직원도 아니고, 계약직도 아닌 인턴에게 관심이 클 리 없겠지만, 낯선 공간의 어색함과 무관심이 겹쳐지면서 내 긴장감은 한층 더해졌다.




알려준 자리에 앉아 마우스 커서만 의미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모두가 바쁘게 일하는 사무실에서 나 혼자만 흐름에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눈치 보며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다가, 손이 가는 대로 옆에 놓인 책을 뒤적였다. 맡은 일은 없고, 그렇다고 휴대폰을 꺼낼 수도 없어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클릭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뒤섞이는 가운데, 나는 마치 정지된 프레임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저어기~ 박지안 주임한테 일 배우면 돼." 팀장님이 말했다.


‘저기’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몰라 주위를 둘러보던 순간, 윤이 나는 까만 단발머리를 한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단정한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 차림이 사무실의 분위기와도 어울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단련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 미소가 딱딱한 공기를 살짝 흔들며 나에게 닿는 순간, 방금까지 잔뜩 무거웠던 어깨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내려앉았다.




“여니 씨, 영어 좀 하지? 이 자료 번역해서 정리 좀 해줘요.”


내가 언제부터 영어를 좀 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니터 속에 빼곡히 채워진 글자들을 마주하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수많은 알파벳이 화면을 가득 채운 채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번역기와 씨름하며 애썼지만, 자꾸 멈춰 서게 됐다. 단어 하나를 붙잡고 고민할 때마다 ‘그동안 공부한 토익 실력은 다 어디로 간 거지?’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머릿속은 점점 엉켜만 갔고, 글자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 기분이 들었다.




“거의 다 됐어요? 언제쯤 줄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해서 “아… 네네!..”라고 얼버무리며 답했다. 떨리는 손으로 서툴게 정리한 자료를 주임님께 건넸다.


"잘했어. 근데 내용이 너무 길어서, 조금 더 간단하게 요약해줘~“


주임님은 문서를 넘기며 특정 문단을 가리켰다.


“이 부분은 두세 줄 정도로 요약해 주고. 그리고 여기도.”


그 말에 나는 다시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학교 최고참 선배였는데, 지금은 낯설고 서툰 사회 초년생이 된 현실이 실감 났다.




“자기, 왜 이렇게 긴장해? 안 잡아먹어~” 점심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던 중, 주임님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농담을 건넸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공간에서, 순간 굳어 있던 내 얼굴에도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주임님의 한마디가, 그 말할 수 없는 긴장의 응어리를 살며시 건드려준 듯했다. 주임님은 자신의 첫 사회생활 이야기를 들려주며, 처음에는 노트를 들고 다니며 선배들이 알려주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가며 배웠다고 말했다. “두 번 물어보지 않게 좀 느려도 처음에 잘 듣고 적어놓는 게 중요하더라고,”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자, 감당하기 힘들었던 긴장감 속으로 잔잔하고 연한 바람이 스며들어 작은 안도의 공간이 생겨났다.




동그란 얼굴에 초코송이 머리를 한 박 주임님은 그동안 만난 어떤 선배보다 따뜻하고 친절했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불안한 내 첫걸음이 그저 혼자만의 두려움이 아니라는 걸, 조용하고 다정한 응원 속에서 조금씩 깨달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임님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봄날의 햇살, 최수연’ 같은 사람이었다. 짧은 인턴생활이었지만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전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났다. 그렇게 3개월의 떨리는 첫 인턴생활을 나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자주 가던 편의점에 처음 보는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긴장한 얼굴로 바코드를 찍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앳된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했다. 앞사람이 물건을 많이 골라서 당황한 듯 보였고,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 처음에는 작은 실수에도 긴장하며 숨을 삼키곤 했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해주셔도 돼요.” 밝은 햇살 같던 주임님처럼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무뚝뚝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이었다. 내 말에 아르바이트생이 감사하다는 말과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른 결혼과 짧은 회사 생활로 ‘좋은 선배’가 될 기회는 많이 없었지만, 적어도 ‘친절한 손님’으로는 살고 있다. 그때 받았던 따뜻한 응원이 누군가에게 다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인생은 ‘작은 친절을 주고받으며 지탱되는 것’ 인지도 모른다. 남이 나를 위로해 주었듯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서툰 발걸음을 감싸주는 작은 친절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 나가며 점차 더 큰 마음 파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 다정함은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며, 결국에는 세상을 한층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이치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간관계 속 다정함이 점점 희귀해지고, 세상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경쟁적인 분위기로 변해간다. 뉴스에서는 서로의 실수에 가혹하고, 배려가 사라진 세상의 단면을 마주할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이런 ‘작은 다정함’들이 어쩌면 지금의 세상에 더욱 필요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따뜻한 손길이 스쳐간 자리마다 새로운 시작이 움트듯, 그날의 작은 친절은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아 또 다른 다정함을 피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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