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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Nov 11. 2024

내 사람들 덕에, 오늘도 괜찮아진다


토요일 오후,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해 시끌벅적했다. 나는 태연한 척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 깔끔히 발린 립스틱과는 달리, 내 마음은 점점 더 소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둘 늦는다는 연락을 보내왔고, 나는 혼자 자리에 앉아 익숙한 불안감을 느끼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불안이’는 귀엽던데, 내 곁에 있는 이 녀석은 그런 매력도 없다. ‘나오지 말 걸 그랬지?’ ‘너 또 가슴이 답답해지면 어쩌려고?’ 초대한 적도 없는데 매번 찾아와 나에게 속삭였다. 이 친구 참 끈질기다.          



그때 멀리서 손을 흔드는 친구들이 보였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는 순간, 답답했던 마음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며들며 숨 쉴 틈이 조금 생겼다. 내 단짝 ‘불안이’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었지만, 그 무거운 기분을 잠시 밀어내는 듯했다. 조금씩 마음이 풀려갈 즈음, 우리가 가기로 했던 식당에 도착했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기 번호를 받으니 우리 앞에만 8팀. 어차피 기다려야 하니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때 초코소스가 뿌려진 아이스크림콘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굳이 말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이스크림 맛있겠지? 먹을까?"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친구들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밥 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하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다들 "그래, 뭐 그 정도야 먹을 수 있지" 하고는 아이스크림을 사 와 이제 겨우 한 입 먹었는데, 식당에서 자리가 났다는 메시지가 왔다. 셋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순간, 별말 없이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밥 먹으러 가면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들어가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다."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우스워서, 식당에 들어가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메뉴를 주문하는 것도 예상 밖이었다. 메뉴판 대신 큐알코드로 주문해야 한다니, 낯설었다. 친구가 구시렁거리며 어설프게 이것저것 누르는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야, 우리도 늙었나 봐. 신문물은 따라가기 힘들다~"라며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말했다. "근데 왜 굳이 큐알코드를 쓰지? 메뉴판 보는 게 훨씬 편하지 않아??" 그러자 다른 친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뉴판을 만들면 환경오염이 되니까?" 그 말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메뉴판이 일회용도 아니고 무슨 환경오염씩이나~~" 그야말로 실없는 소리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나를 짓누르던 불안은 점점 뒤로 물러났고 우리의 웃음과 농담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나는 그저 마음껏 웃고 있었다.           




그렇게 떠들다 보니 대화는 어느새 진지해졌다. 남편이 너무 가정적이라 가끔 숨이 막힌다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외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이 키우는 건 적성에 안 맞는다던 친구는 둘째를 생각 중이라며, 명품 팔찌와 다이아 반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고 말하는데 그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심리상담을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말해놓고 나서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사실, 심리상담 얘기를 꺼내는 건 쉽지 않았다. 상담을 받는다고 하면, 나를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받아들일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무슨 일 있었어?"라는 친구들의 물음에는 평소처럼 나를 걱정하는 따뜻한 관심이 담겨 있었다. 그저 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친구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내가 나 스스로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여겼던 건 아닐까. 허탈하고 내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버스 안에서, 문득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카페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내 곁을 떠나지 않던 ‘매력 없는 불안’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스무 살, 우리는 참 별거 아닌 일에도 배가 아프게 웃곤 했다. 그때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제는 그런 소소한 기쁨을 느낄 일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만남이 그 시절로 다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오래된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그 안도감은 마치 오랜 세월 조심스레 간직해 온 보석상자 같았다. 그 안에는 서로를 향한 배려와 이해가 고요히 빛나고 있었고,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속 깊이 깔린 소중함이 전해졌다. 20년의 시간을 함께하며 쌓인 그 특별함이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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