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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19. 2023

연꽃차는 연못맛입니다

<어제의 두 줄 일기>

덜 행복한 걸 선택한 것 같은 날에는 감사할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 휴대폰 배터리가 넉넉하다는 것
  - 가방에 김밥 한 줄이 있다는 것

아무튼 내일은 차를 마시러 가야겠다.


  사실은 저도 제 자신을 100%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살면서 겪는 일을 통해 나를 알아가며 아, 이게 나였어! 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제는 시간을 통째로 버린 기분이 드는 날이었습니다. 주말이었기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 대신 일을 한다면 '뿌듯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어제는 모든 게 어긋난 날이었습니다. 결국 제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두 차례 지연이 되는 동안 쓴 일기에는 지친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아침식사로 간단하게 또띠아 샌드위치를 만들겠다며 사과와 양배추를 채 썰고 계란프라이, 소시지(목우촌 레몬 파슬리 부어스트를 사봤는데 맛있었어요)를 굽고, 각종 소스들을 꺼내 부엌을 초토화시키고는 설거지도 미룬 채 외출을 했습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제주의 동쪽, 조천입니다. 머리가 복잡한 날에는 운전대를 잡으면 생각이 잘 정리가 됩니다. 아마 감정적인 마음으로 운전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살고 싶은 본능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다리로는 절대 달릴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오늘은 연꽃차를 마실 계획입니다. 어제 차를 마셔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마시고 싶었던 차입니다. 무슨 맛일까, 달콤한 꽃향이 은은하게 날 것 같은 연꽃차를 직접 마실 수 있다는 기대에 신이 나네요. 이 신나는 기분에 맞는 음악을 골라봅니다.

박재범 Jay Park - 'DRIVE (Feat. GRAY)' Official Music Video - YouTube

  

  연꽃차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뒤늦게 KBS <더 시즌스 드라이브>를 보며 박재범 님의 음악에 빠졌어요. 심쿵할 가사 한 번 읽어 보시겠어요?

 

모든 일들이 잘 안 풀리고 있을 때, 스트레스가 어깨에 가득 차 있을 때
너만 보면 맘이 너무나도 편해져. 모든 고민 모든 걱정들이 싹 없어져.
내 차에 올라타. 바람 쐬러 가. 밥 먹지 말고 와. 전부 내가 해줄게.


  전부 내가 해줄게라고 말하는, 가사 속에 존재하는 이 달콤한 남자가 참 마음에 드는군요. 비트가 빨라 따라 부르면 외계어를 하게 되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벌써 눈앞에 목적지가 보입니다.


제주 필연 @무지개인간

 

  정원을 수놓은 꽃들이 반겨주는 이곳은 갤러리카페 필연입니다. 방문했을 때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반드시 만나야 할 인연이라는 뜻의 '필연'과 곧 우리가 마실 아직은 봉오리 상태인 연꽃차를 떠올리며 '필 연'이라고 지은 이름 같네요. 사장님께서 아주 친절하고 유쾌한 분이셔서(MBTI 'E' 같았어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여쭈어볼 걸 그랬어요.


제주 갤러리카페 필연 @무지개인간


  첫 번째 손님이라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어요. 날이 좋아 야외로 갈까 하다가 필연과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좌식 테이블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백련과 연잎으로 만든 차를 주문하고 카페를 둘러보았지요. 도자기로 만든 꽃에서는 향기가 날 것 같아 한참을 보고 또 보고, 자세히 다시 보았어요. 들꽃처럼 작고 소중한 것에 감동을 받는 저는 어느 도예가의 섬세한 표현에 또 마음이 찌릿했지요.


연꽃차 @무지개인간


연꽃차는 카페인도 없고 면역성을 높여줘요.   


  필 연이 활짝 핀 연이 되어 우리 테이블을 가득 채웠습니다. 연꽃차는 처음이라 무척 기대가 되네요. 이곳의 연꽃차는 서너 명이 함께 마시는 차입니다. 찻물 속에서 꽃잎을 한 장씩 펼치고 고요하게 떠있는 이 유유자적의 연꽃차를 아무도 먼저 깨우지 못하고 있어요. 잠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스며들며 연꽃차가 되어 가는 과정을 조금 기다려주기로 합니다.


연꽃차 @무지개인간


  영상으로 보시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넓은 수반에 나온 연꽃차를 도자기로 된 작은 차 국자로 떠서 개인 컵에 담아 마십니다. 차는 눈, 코, 잎으로 마신다고 하잖아요. 우리 집 (사)춘기가 일곱 살 때 유치원에서 배운 다도를 대접해 주던 날이 떠오릅니다. 귀한 연꽃차 앞에서 더 귀한 추억을 꺼내보았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일곱 살 춘기가 물어봅니다.


차 색이 어떠십니까?
    

  연꽃차의 색은 연 노란 빛깔의 암술색을 닮았습니다.



차 향이 어떠십니까?

  연꽃차의 향은 풋풋한, 덜 여문 열매의 향이었습니다. 상상했던 잘 익은 꽃향은 아니었습니다.



차 맛이 어떠십니까?

  연꽃차의 맛은 맑은 연못맛입니다. 연꽃차의 태어난 연못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연자(연꽃의 씨)가 진흙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은 한살이가 풋풋한 향에 얹어져 있습니다.


  연꽃차가 들려준 나고 자란 고향의 이야기는 사람의 지난 시간을 꺼내 주었습니다. 특히 춘기는 연꽃차 한 잔에 아빠, 엄마와 함께 연꽃 밭으로 나들이를 갔던 기억, 연잎에 맺힌 물방울을 또르르 굴리며 놀았던 기억, 연밭 사이를 헤엄치던 물오리 가족을 만났던 기억까지 많은 기억들을 떠올렸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오랜만에 기억의 조각을 맞추었습니다.    


제주 조천 필연 @무지개인간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통째로 버리고 싶었던 어제의 일은 휙, 날려 버리고 새로운 감정으로 밀도 있게 채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잘 쓴 시간은 '불스원샷'과 같은 에너지를 채워줍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잡고 작은 행동이라도 다시 시작하며 평소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호하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찾아두시면 좋습니다. 쉼이 필요한 순간에 나만의 비법을 골라 쓸 수 있거든요.


  갤러리 카페 '필연' 근처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과 곰취만두가 유명한 선흘방주할머니식당이 있어요. 제주 동쪽 여행 코스를 찾고 계신다면 세 곳을 넣어 일정을 짜보시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해당 장소의 위치를 확인하세요. 오늘도 무지개인(공)간을 방문해 주시고, 제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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