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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08. 2023

오늘은 딱 한 모금만

6년 뒤에 정식으로 한 잔 합시다

저에게 행복하냐고 묻고 싶다면
커피 한 잔부터 손에 쥐여 주세요.




엄마, 커피 한 모음만 마셔 봐도 돼요?



  응, 한 모금만 마셔.
그리고 엄마가 커피를 마셔 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기억해 주었으면 해.


  6학년 아이의 물음에 내 대답이 두 마디가 되는 순간, 아이는 얼른 입 안을 가득 채우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뗐다. 

  '이제 커피 맛이 궁금해질 나이가 되었구나. 하긴 어른들이 아침에 일어나 커피부터 찾고 피곤하고 지칠 때도 커피부터 외치니 커피란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나 궁금하기도 하겠지.'

  준비했던 것은 아닌데 프롬프터가 눈앞에 있는 듯 아이를 향해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이제 너는 어린이가 아니라는 뜻이야. 아직 어른도 아니지만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엄마는 곧 어른이 될 너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겠다는 뜻이야.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네가 맡은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의무를 알아차려야 해. 자유롭게 생각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지만, 그 자유 안에 함께 있는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 쉽게 이야기하면 지금은 학생이니까 공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너의 꿈을 찾아 어느 방향으로 걸으며 어른이 될지 정하렴.”

 

  아이는 1분이 넘게 이어진 연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스치는 물을 먹고도 콩나물은 쑥쑥 자라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잔소리지만 커피를 마셔도 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머릿속에 새겼을 것이다. 

    

  나는 커피 애호가이다.

  지금도 여전히 커피를 무척 사랑하는데, 요즘은 에스프레소에 빠졌다. 커피를 마신 경력에 따라 좋아하는 커피는 매번 달라졌다. 처음 커피를 마신 스무 살에는 캐러멜 마키아토가 가장 멋진 커피였다. 아직은 너무 쓴 원두의 맛을 달달한 캐러멜 시럽이 덮어주는 다정한 메뉴였다. 캐러멜 마키아토가 물릴 때쯤 알게 된 것은 헤이즐럿 향 커피였다. 단짝 친구 연남이 먼저 마셔보고는 추천을 해주었다. 이제 나도 탈(脫) 시럽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다음에 빠진 커피는 바로 블루마운틴이었다. 스물한 살 때 네 살 많은 언니에게 배운 것인데 그때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첫 데이트를 하게 되거든 꼭 블루마운틴을 시켜. 성숙한 여인의 모습도 풍길 수 있을 거야."

  블루마운틴을 시키면 된다고 배웠지만 그해에도 그토록 기다린 블루마운틴을 시킬 기회는 없었다. 그렇게 '슬픈 산'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커피 취향은 메뉴판을 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20대에 마시던 커피는 어른이 되었다는 쾌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부모님의 허락이 없이도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고 커피숍의 문도 당당하게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주는 해방감만 알았지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그때는 미처 하지 못 했다. 20대가 끝나도록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집에 살고 있었고, 다소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더라도 두 분은 품어주셨다. 3억을 잃고 방황하는 마흔이 되어 시간을 반으로 쪼개 보니 이제야 혼자 힘으로 해내려고 애쓰는 어른이 된 것 같다. 얼마나 늦게 철이 든 건지 생각할수록 부끄러워진다. 

  

  이제야 커피를 마시는 것의 의미를 알아간다.

  20년 동안 커피를 무임승차하듯 마시고 마흔이 넘어서야 커피를 마시는 것의 의미를 어른이 되어 가는 것과 연결시켜 보았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일에, 특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 앞에서 나는 책임을 다했는가'

  '최고는 아니더라도 내 양심의 기준으로 최선을 다했는가'

  다행인 것은 적어도 마흔이 넘어서는 피하거나 미루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하다고 칭찬을 보낸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어쩌면 아이에게 늘어놓은 말은 스무 살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다정한 독자님, 즐거운 목요일입니다.


  아침에 떠오른 첫 생각인 '저에게 행복하냐고 묻고 싶다면 커피 한 잔부터 손에 쥐여 주세요'라는 문장을 쓸 때는 아, 여전히 커피 한 잔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구나!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올랐어요. 

   굳세나 작가님을 만났다 (brunch.co.kr)

  어제 '굳세나 작가님을 만났다'로 브런치스토리를 쓰다 보니 '커피 한 잔=행복' 말고도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과거에 썼던 커피와 관련된 두 편의 글을 꺼내봅니다. 두 편의 글 중 비교적 최근에 쓴 글은 오늘, 2년 전에 쓴 글은 내일 올리려고 합니다. 2년 전에 쓴 글이 내일 올라가는 이유는 낯간지러워서 아직 읽기 못했기 때문이고요. 꼭 용기 내서 오늘 다시 읽고 보겠습니다. 


  오늘도 독자님의 하루가 행복하길 빕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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