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이가 드는 것을 애써 거스르지 않는 쪽입니다. 마흔이 되니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어느 날은 눈가에 주름이 유독 도드라져 보일 때가 있고, 어떤 날에는 대화 도중에 특정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헤맬 때도 있지만 제 안에 녹아 있는 시간과 추억, 사람과 경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어제는 금요일이라 자기 전에 아이들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어요. 10월 말까지 응모하는 글쓰기 공모전에 도전해 보자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50년 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해 보자고 했지요. (사)춘기와 열 살 초등학생, 겨울이의 하늘을 나는 자동차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 한 마디를 거들었습니다.
그래! 우리 '엘리캐슬' 봤잖아, 그런 세상이 곧 올 것 같아!
순간 정적이 흐릅니다. 얼음이 된 초등학생과 달리 춘기는 상황 판단과 문제 해결력이 4년 앞섭니다.
"엄마가 본 '엘리캐슬'이 우리가 함께 본 그 영화 맞지?"
조심스레 확인하더니 영화의 제목은 '엘레멘탈'이라고 고쳐 줍니다.
"형, 엄마가 엘리멘탈을 엘리캐슬이래. 엉엉."
"엄마 왜 그랬어. 엘리캐슬이라니. 슬퍼. 엉엉."
요즘 들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아이들은 '엄마의 실수' 레퍼토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도입부를 바꿔가며 그동안의 실수를 줄줄 늘어놓습니다.
"엘리멘탈을 엘리캐슬이래. 엉엉"이라며 시작된 엄마의 실수를 가사처럼 읊조리고는 곧 다음 실수를 불러냅니다.
"선풍기 어디 있노?"
지난여름, 분명히 거실에 선풍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 선풍기 어디 있냐고 물어봤더니 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얼굴을 한 번, 둘이 마주 보면 한 번, 다시 제 얼굴을 한 번 쳐다보며 눈만 껌벅거리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선풍기를 보았냐고 물어보았지요.
"엄마 바로 옆에 있는데... 엄마 진짜 안 보여?"
"형, 엄마가 선풍기를 앞에 두고 선풍기가 어디 있냐고 물어. 엉엉. 우리 엄마."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선풍기 어디 있노? 엉엉. 엄마 왜 그래?"
그 다음날 춘기가 묻더라고요.
"엄마, 그때 진짜 선풍기 못 찾아서 물었어? 난 엄마가 또 장난치는 줄 알았지."
"야! 춘기 네가 내 나이 되어봐라."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핸드폰을 앞에 두고 "핸드폰 어디 있노?", 과자를 앞에 두고 "과자 어디 있노?"라고 말을 하며 이리저리 찾는 시늉을 합니다. 춘기에게 제 나이가 되어 보라고 말은 했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집안에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저 행복합니다.
그래도 '엉엉'이라고 말하며 눈은 우는 표정으로, 입으로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두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천천히 늙어야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실수가 있을 때면 비록 당황한 눈빛은 있었지만 '엉엉'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올해는 아이들이 유난히 쑥 자란 기분이 듭니다. 중학생이 된 큰 아이 여름이는 소리도 두어 번 질러보는 격동의 사춘기를 겪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고, 열 살 겨울이도 개성과 취향이 선명해지면서 세대 차를 느끼기도 합니다. 가끔은 여름이와 저 사이에서 (사)춘기가 통역을 맡기도 합니다.
"겨울아, 성시경 오빠 잘 생겼지?"
"음......"
아니, 이게 고민할 문제입니까? 한참을 생각하더니 드디어 대답을 들려줍니다.
"응. 이찬혁이 제일 멋있고 그다음으로 멋있어."
제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자 이번에는 두 아이가 들고일어납니다. 이찬혁이 제일 멋있다고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악동 뮤지션(악뮤)인가 봅니다. 나의 성시경 오빠가 찬혁이에게 밀리네요.
'아, 세대 차!'
양보 없는 성시경 가수와 이찬혁 가수의 잘생김 대결에서 통역관 춘기의 중재가 들어갑니다.
"겨울아, 그만해. 지금 엄마의 마음속 1등은 성시경이잖아. 그냥 좋아하게 놔둬."
춘기는 다음 날 아침, 점심, 저녁마다 물어봅니다.
"엄마, 어제 받은 충격은 이제 괜찮아졌어?"
잊을 만하면 자꾸 물어보니 안 괜찮지. 왜 자꾸 물어보니? 기억나게.
엄마는 대충 기억하며 살아도 행복하거든.
그나저나 너의 사춘기는 어쩜 이리 다정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