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시작으로 개천절, 한글날까지 시월 '달력의 축복'을 모두 받고 나니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더 힘듭니다. 전날도 10시에 잤지만 새벽 6시 30분 알람소리에 겨우 일어났어요. 쌓인 피로를 풀기에는 '우루사'가 필요한 나이인가 봅니다. 하하. 코끝은 시리고 재채기가 나서 비염의 계절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거운 여름의 기운을 밀어내고 가벼운 가을 공기가 이곳을 뒤덮은 기분입니다. 아무튼 가을 아침의 공기가 반가운 아침입니다.
평일 아침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학교까지 -늦지 않도록- 데려다주는 일입니다. 운전대를 잡으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에서 매일 블로그씨의 질문이 배달되는 것처럼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설거지를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데 이때는 집안일의 일부라 그런지 주로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만 운전을 하며 드는 생각은 그 경계가 없이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나 봅니다. 오늘 아침에는 '키우는 즐거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가을이 오니 볕이 좋아서인지 화분을 실내로 들이고 싶어 집니다. 이전에 살았던 집에는 은행에서나 보이는 큰 화분이 여러 개 있었는데 야레카 야자, 스파티필룸 등 관엽 식물을 주로 키웠습니다. 노란빛이 도는 베이지색 소파에 앉아 초록 식물을 보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고개를 갸웃하며 새 잎을 찾았을 때는 갓난아기를 만난 듯 숨길 수 없는 설렘을 느낍니다. 동시에 일을 하다 지금은 하지 않는(게 잘못은 아니지만) 내 자리를 잃은 듯한 상실감 대신 지금은 다른 식구들을 대신해 집안 곳곳을 살피고 있노라고 상기시켜 줍니다. 그 귀한 화분은 제주로 오며 정리를 했고, 작년에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나머지 화분도 모두 정리했습니다. 작은 화분 하나 두지 않은 것은 돌볼 정신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지요. 이제는 마음에 여유가 조금씩 생기는지 다시 집을 초록 공간으로 바꾸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나무 시장으로 가보았습니다. 야레카 야자는 꼭 사야지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아직은 관심을 쏟아야 할 대상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이라는 생각이 어깨를 눌렀습니다. 식물이 물만 주면 잘 자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느끼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원예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다육은 잘 큰다고 생각해서 부담 없이 사는데, 다육은 스스로 물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천천히 죽을 뿐이에요."
식물이 '반려 식물'이 된 요즘, 죽이지 않고 잘 키우며 오랫동안 같이 살 나무를 들이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아직은 그 생각이 행동을 기다려줘야 할 듯합니다.
그럼 다시 물 생활을 시작해 볼까? 생각했다가 이내 접었습니다. 어항은 식물을 키우는 것보다 손이 더 많이 간다는 것을 아주, 충분히 알고 있기에 얼른 접었습니다. 문득 저는 언제, 누구를 또는 무엇을 통해 키우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아이, 예뻐, 우리 춘기."
"오구오구, 예뻐라, 우리 집 꽁지!"
매일 아침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이렇게 일어납니다. 귀여운 아기 강아지 같던 시절부터 이제는 제 키를 넘어서는 사춘기 청소년이 되었고, 잉글랜드 쉽독만 한 커다란 덩치에 열 살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제 눈에는 그냥 귀엽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이 그저 귀엽기만 합니다.
아이들이 아침을 행복하게 시작하도록 신경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이가 예쁘고,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아침 시간에 대한 생각의 환기는 춘기가 다섯 살 때 한 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둘째가 갓 태어나고 육아 휴직을 하며 전업 육아에 돌입했는데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자기 전에 대화를 통해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때 춘기는 너무 어려서 말하지 못했던 몇 년 전의 일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날도 생각하지 못했던 춘기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습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슬펐어.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해야 할 어린이의 아침이 슬프고 눈물이 났다는 우리 춘기. 제가 새벽에 일어나 7시가 되면 출근을 했기에 춘기는 그때 혼자 일어나는 그 쓸쓸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넓은 안방에서 혼자 덩그러니 앉아 울었다는 춘기와 춘기가 울면 열리는 방문, 혹시나 엄마일까 싶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라서 또 속상했다는 춘기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러고 보니 동이 틀 무렵이면 뒤척거리며 엄마를 찾는 아이의 행동이 왜 이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풀리게 되었지요. 춘기는 불안했던 것입니다. 춘기와 약속을 했어요. 행복한 아침을 시작하자고.
그날부터 아침마다 아이들을 안아주며 깨우고 있습니다. 음, 지각을 할 정도로 늦잠을 잤을 때는 빼고 말이죠. 밤에 자기 전에는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매일 나누고요.
글로 적으니 엄청 사랑이 가득하고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낮에는 숙제는 했니, 흘린 것은 닦고 다녀라, 정리 좀 해라 등 잔소리가 가고 신경질이 옵니다. 하지만 해가 뜨고 질 때는 붉은 태양의 기운 덕분인지 온화합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서로 껴안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보내는 것이 우리의 오랜 규칙처럼 되어 있어요.
스스로도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낳았지만 아이를, 이토록 오래 사랑할 줄은 몰랐어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이렇게 큰 줄도 몰랐고요. 한때는 엄마로서 부족한 부분을 느끼기도 했고, 제가 아는 만큼이라도(그 시기까지라도) 사랑으로 키울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지만 이제는 부족한 부분은 아이들도 채워주고 있는지 일방적으로 사랑을 줘야 하는 엄마가 아니라 관심과 사랑을 주고받는 가족이 된 기분입니다. '헬육아'를 하던 중에도 남의 육아는 힘들지 않아 보인다는 친구에게 "나도 육아가 나와는 잘 맞지 않아, 그래서 정말 최선을 다해. 내가 사람을 낳아서..."라고 말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던 때도 있었네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숨 쉴 공간이 생기면서 오히려 요즘은 더 즐겁게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가끔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순간도 있지만 구멍 난 틈으로 구겨 날려 버립니다.
생각해 보니 아직은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에서 보람을 찾는 엄마이고 사람입니다. 관점을 바꾸어 보면 아이들이 잘 자라주었고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이며, 나눠야 하는 사랑 곳간을 부모님께서 제 어린 시절에 잘 채워주신 덕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제 삶을 더 넓고 큰 세상으로 이끌어주고 저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거실을 초록 식물 나라로 만들고 싶지만 내년 봄에 키울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때 제 마음을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아직은 키우는 즐거움은 아이에게만, 사람에게만 느끼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