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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May 14. 2024

주행 가능 거리 0km인 차를 타고

 ‘주행 가능 거리 Okm'에도 차는 달립니다.
  하지만 간이 커야 운전이 가능합니다.


  제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만한 사실. 그것은 제주 사람들은 대체로 주행 시간이 20분이 넘는 거리는 무척 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쏘다녔지만 이제는 '우리' 동네만 다닙니다. 이제는 20분 거리에 있는 애월도 꼭 가고 싶은 밥집이 있다거나 볼 일이 있어야만 가게 됩니다. 그렇게 다니던 서귀포는 한라산을 넘어가야 하거나 둘러 가야 하는 낯선 여행지입니다. 그러던 제가 오늘은 장거리를 뛰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박완서 작가를 좋아하는 이웃 언니에게 박완서 작가님의 코너가 있는 책방을 소개해 줄 계획이거든요. 언니가 와산의 어느 초록 숲 속에 위치한 책방에서 산새 소리를 들으며 최애의 책을 고르는 장면이라니! 상상만 해도 힐링이 됩니다. 4월부터 기다린 이 장면을 드디어 언니에게 선물하는 날입니다.


  주행 가능 거리 15km.

  아뿔싸! 전날 주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더 급한 일로 미루었는데 시동을 켜니 주행 가능 거리가 15km라는 안내가 뜹니다. 집에서 책방까지의 거리는 16km가 넘는 데다 언니의 집 앞으로 갔다가 밥을 먹고 책방으로 갈 계획이니 꼭 주유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부들은 외출을 하기 전에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도 쓰레기만 좀 버려야겠다며 큼직한 것만 좀 치웠는데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유를 먼저 하고 언니네 집 앞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아주 발 빠르게 바꾸었습니다. 선 픽업 후 주유로 말이죠.


  언니의 집은 제가 제주에서 처음 살았던 동네, 해안동입니다. 해안동으로 가는 길은 자동차의 앞유리창 너머로 한라산과  그 아래 초록이 드넓게 펼쳐진 목장 마을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저는 이 찰나를 무척 사랑하는데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오늘 날씨는 먹구름이 조금 낀 흐린 날씨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요즘 푹 빠져 있는 노래를 들으니 행복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동구에 있는 노란색 시멘트 다리 앞에서 여대생처럼 걸어오는 언니를 보았습니다. 노란 개나리가 피었다가 진 계절이지만 언니의 발걸음과 얼굴에 담긴 미소를 보니 여전히 이른 봄의 향기가 머물러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식당입니다. 대흘초등학교 앞에는 '이효리, 아이유가 방문한' 타이 음식점인 '타무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배를 볼록하게 채우고 다음 목적지로 갈 예정입니다. 오랜만에 어른 사람과 함께 제주 동쪽으로 나들이를 나오니 그저 신나고 즐거운 기분이 듭니다. 날씨가 흐렸지만 화창한 봄기운에 취한 듯 달려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식당의 오픈 시간인 11시에 맞춰 도착했더니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식사 주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맡은 향신료의 향은 일상 속에서 기분 좋은 환기가 됩니다. 다 맛있어 보이는 메뉴 중 팟타이와 튀긴 월계수 잎이 올라간 타이 치킨을 시켰습니다.


타무라 제주 @무지개인간


  딱 알맞고 충분한 것 같아요!

  시킬 때는 샐러드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했는데 식당 문을 열고 나올 때는 충분한 포만감이 차오릅니다.

  '최근에 위가 줄어들었나?!'

  살랑이는 바람 따라 팔랑이는 나뭇잎처럼, 살이 빠지려나 하는 설레발에 제 마음도 봄바람도 탄 듯 설렙니다. 역시 자비로운 마음은 탄수화물을 비롯한 든든한 밥심에서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멀리 나온 김에 맛있는 커피도 한 잔씩 마시기로 했습니다. 마침 생각이 난 카페 ‘5L2F'로 가서 카페인 충전을 하며 완벽한 식사 코스를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계획했던 일이 좋은 시간으로 착착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 가만히 있어도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날입니다.


  주행 가능 거리 0km!!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귀가 막 간지럽습니다.

  '야이 주인 X야, 배 부르냐? 나는 땡볕에서 기름만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다!'

  럭키라는 애칭까지 붙여준 저의 귀여운 반려 자동차가 입도 없이 험한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것 같습니다.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자동차인 럭키가 그럴만하지요. 사실 주유를 해야 된다는 것을 출발하기 전에 생각한 뒤로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그 길고 긴 길을 달리며 주유소가 있나 없나 살피지도 않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지도 않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선택을 해서 해결하면 됩니다.

  보험사에 급유 서비스를 요청할까, 그러면 1시간 정도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다려야 합니다.

 ‘주행 가능 거리가 0km 더라도 10km 정도는 갈 수 있다’, 제 주변에 이것을 증명한 이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믿고 싶은 희망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주유소를 찾아보았습니다.


  오호통재라!

  무려 4.8km나 떨어진 곳에 가장 가까운 주유소가 있다고 합니다. 주유소와의 거리보다 서너 배는 더 먼 마음의 거리가 느껴지니 이제껏 하지 않았던 걱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심장이 아주 쫄깃해집니다. 그래도 더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주행 기어에 놓고 천천히 움직여보니 다행히 럭키도 앞으로 갈 결심을 보여 줍니다. 주행 가능 거리가 0km라도 자동차는 본능적으로 달릴 의지를 보여주었고, 더 다행인 것은 기름이 아주 똑 떨어지지는 않았나 봅니다. 기름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고 있는 배고픈 럭키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집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제가 럭키를 업고 주유소로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네요.

  "에어컨을 끌게요."

  에어컨 바람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사치입니다. 재빠르게 사치부터 끄고 기름통이 텅 빈 럭키의 희망에 동참합니다.


  '럭키야, 1km만 버텨줘... 600m만 버텨줘...'

  결국 럭키는 무탈하게 주유소에 도착했습니다. 중간에 정신을 잃어 시동이 꺼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는데 우리 럭키는 정말 Lucky입니다. 입이 없어 말도 못 하고 진땀을 뺐을 럭키에게 5만 원짜리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주유 중에 미리 결제를 해주신 주유소 이모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 주유 덜 끝났으니 출발하면 안 돼요."

  "그럼요. 그럼요. 저도 지금 한 방울이라도 귀하거든요."

  그동안은 주행 가능 거리 5km가 남으면 꼭 주유를 했는데 이번에는 기어코 0km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주유소를 찾아 심난한 주행도 했고요. 이 지경에도 마음은 조금도 조급해지지 않은 것을 보니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나 봅니다.


  기름이 없어 차가 선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건너서 듣기는 했지만 제가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유소를 코앞에 두고는 기름이 떨어져 갑자기 끼익- 소리를 내면 서는 것은 아닐까, 뒤따라오는 차들은 얼마나 놀랄까 하는 걱정도 되었고요. 그러니 이런 일은 가급적 겪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기름을 채워두면 피할 수 있는 예상 가능한 사건이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주행 가능 거리가 0km라는 안내 문구가 나왔지만 럭키는 4.8km를 달려 주유소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이쯤 되면 진짜 남은 주행 거리가 얼마인지 궁금해지겠지만, 저는 알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제 럭키의 배도 빵빵해졌으니 다시 카페로 가야겠습니다. 왠지 더 폭신하게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사람이나 자동차나 잘 챙겨 먹어야 신이 나는가 봅니다.  


룰루




  첫 사진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입니다. 생생한 그날의 현장은 함께 간 언니가 낯선 경험으로 얻을 피로를 헤아려 멈칫하다 사진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이 멋진 그림을 글 제목 사진으로 골라봅니다.


  밥 먹고 커피만 마시고 오느라 가지 못한 책방은 이곳입니다.

  숲 속에 온 것 같은 위치와 풍경도 좋지만 무엇보다 책방 대표님의 도서 큐레이팅과 단정한 공간이 마음을 맑게 만들어서 참 좋았습니다. 와산에 있는 누운 산 책방입니다.


    

  예전에도 브런치스토리에 글(15화 살이 찌는 것은 모두 맛있다 (brunch.co.kr))을 쓴 적이 있는 이곳은 모든 메뉴가 다 맛있습니다. 특히 타이치킨에 향긋한 튀긴 월계수 잎을 곁들여 함께 먹으면 아주 상큼(!)합니다.

   

    이곳도 워낙 유명한 조천 카페입니다. 커피도 맛있는 디저트로 준비된 치즈케이크가 무척 매력적입니다. 이번에 방문했더니 9개월 된 청삽살개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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