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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12. 2024

피아니스트 말고 박 기사

연주 대신 주행

  다들 어릴 적에 피아노 학원 다니셨쥬?
  다들 나는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줄 아셨쥬?


  저도 그랬어요. 저는 커서 제가 피아니스트가 될 줄 알았어요. 아, 잠깐만요.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더 이상 쓸 수가 없네요. 우선 조금 진정한 다음에 야생 두더지처럼 저의 20대, 30대 그리고 지금의 40대까지 헤집어볼게요. 그런데 암만 찾아도 피아니스트는커녕 'ㅍ'조차 없네요. 전혀요. 피아니스트가 될 줄 알았다더니 도대체 언제? 아무리 봐도 피아니스트가 될 뻔한 삶의 근거가 단 하나도 없어요. 아냐, 뭐라도 있을 거야. 지금 키보드를 꾹꾹 누르고 있는 저 손가락. 가늘고 긴 손가락. 아하, 그때!


  저는 아홉 살이 되면서 피아노 학원에 처음 갔어요. 우리 피아노 교습소 선생님은 '티나'라고 불렸는데 무척 예뻤답니다.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히메나 선생님을 닮았어요. 반짝이는 예쁜 눈과 고운 목소리, 헤어 스타일까지 히메나 선생님이 브라운관을 뚫고 나온 모습이었어요. 아마 천사가 지상에 머물고 있다면 티나 선생님일 거라고 생각도 했어요. 게다가 무척 친절하셔서 저는 금방 피아노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피아노를 배우다 보니 손가락을 관찰하는 시간이 자연스레 생기더라고요. 사실 피아노를 배우기 전에는 다른 친구들보다 손이 큰 편이라 손바닥을 좌악 펴서 보여주는 걸 싫어했는데 그게 피아노 학원에 가면 되려 장점이 되어서 어깨가 으쓱해질 일이더라고요.


  "무지개인간아, 나, 가운데 도에 엄지 손가락을 붙이고 높은 도에 새끼손가락이 닿아!"

  "나도 해볼까?"

  "응, 해봐!"

  "나도 되네. 레까지 닿겠는 걸."

  확실히 손이 크고 손가락이 길어서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에 많은 건반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은 피아노를 치는데 유리한 신체 조건처럼 느껴졌어요. 게다가 흥미까지 섞이니 조금의 노력과 별 거 아니라도 해볼 의지만 있다면 건반으로 하는 것은 쉽게 되더라고요. 아, 이것은 바이엘 상권까지 이야기입니다. 다들 어렸을 때 바이엘로 배우셨쥬?


  우리가 처음 피아노를 칠 때를 생각해 보자고요. 전 나무토막처럼 생긴 건반이라는 것을 살짝만 눌렀는데 소리가 울리는 게 참 신기했어요. 뭐든 그렇지만 피아노도 처음 배울 때는 참 낯설었는데 피아노 학원을 열심히 다니면서 연습을 했더니 귀에 기름을 바른 듯 부드러워 듣기 좋더라고요. 달력을 넘기듯 날마다 새로운 악보를 만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답니다. 그러다 이곳에도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죠. 그것은 바로 '체르니', 저보다 한 학년 위인 언니가 치는 걸 보았거든요.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얼른 바이엘을 끝내고, 저도 있어 보이는 저 새로운 악보집을 배우고 싶어 졌거든요. 아직 바이엘을 배우는 제 눈에 그 언니야말로 진짜 피아니스트가 될 것처럼 보였고요.


   어쨌든 체르니를 알게 된 뒤로 빨강, 파랑의 표지로 된 바이엘은 시시해졌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바이엘에서 끝나는 거잖아요. 저는 체르니가 배우고 싶은데 말이죠. 피아니스트가 될 것 같은 그 언니의 연주는 확실히 달랐어요. 뭔가 있더라고요. 언니의 손끝으로 만들어진 음이 감동을 들고 제 귀로 들어와 찌르르 심장을 울리더라고요. 이 우아하고 달콤한 감동을 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흘러 저도 바이엘을 끝내고 체르니 악보집을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는데 '페달'을 사용하면 그렇다네요. 소리에 울림을 주면서 음과 음을 부드럽게 이어준대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선생님 몰래 살짝 밟아보는 게 아니라 아주 당당하게 악보에 맞춰 페달을 밟을 수 있게 되었고요. 언니가 맛 보여준 감동 때문인지 페달을 밟는 곡이 나오면 날짜를 세어가며 기다리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여름이었지요.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서 제게 물으셨죠. 아, 지금 이 선생님은 계명음악학원 선생님이에요. 쉰에도 멋있게 혼자 사시던 티나 선생님께서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결혼을 하시는 바람에 집 근처에 있는 다른 학원으로 옮겨 피아노를 배우고 있거든요. 선생님과 볼록하게 잘 부푼 솜사탕 같은 이야기를 나눈 뒤 노래를 부르며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집으로 걸어갔어요. 그리고는 저녁을 먹으며 느닷없이-오늘 낮까지만 해도 이런 기미는 없었으니까요-식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냈죠.


나, 커서 피아니스트 될까?

  "선생님이 나더러 피아노를 전공해 보래. 내가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친대."

  제 머릿속에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드레스를 입고 연주하는 모습이 상상되는데, 이 상상력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이 아니라 힘이 없는지 제 머릿속에서만 몽실몽실 피어나네요. 제 머리를 뚫고 나와 엄마, 아빠, 나의 동생들에게도 전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말하지만 급조는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제 고마 배우는 게 어뜨노?"

 아무튼 예체능을 하겠다는 첫째 딸의 뒷바라지는 버거웠던 가정 형편에-가장 큰 이유는 재능이 부족했겠지요-엄마와 아빠 중 누구의 지혜이며 계획인지 모르겠지만 두 달 뒤에 저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어요.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다고 해서 저의 피아노 역사가 뚝 끊긴 것은 아니었어요. 정말 다행이죠. 피아노 소품집도 열심히 연습하고요, 레코드 가게에 가서 을지악보사에서 나오는 노란 종이의 피아노 악보를 사서 얼마나 연습했다고요. 제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피아니스트가 될 재목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갑자기 지펴진 불이라도 끌 때는 오래 걸리나 봐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아시쥬? 열정도 매한가지예요. 피아노 학원은 그만뒀지만, 피아니스트가 되는 길은 직진도 있고, 좌회전해서 우회전해서 돌아가는 길도 있고, 안 되면 우리의 열정으로 고속도로 하나 만들면 되잖아요. 그쥬?


  그런데 고속도로를 하나 만들려면 말이죠, 꾸준히 계속하는 열정이 필요하더라고요. 지금처럼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는 것은 단지 엘리제만을 위한 일일 뿐이었어요. 게다가 엄마인지 아빠인지 모를 그분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피아노 뚜껑마저 편을 드는 것처럼 점점 무거워지더라고요. 어느 날부터는 드문드문 소리를 내던 피아노도 입을 앙 다물었고, 얼떨결에 꿈꿨던 피아니스트의 꿈도 홀연히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의 제가 되었지요.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상상 대신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지금의 제가 되었지요.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 작디작은 불씨는 마음 안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자동차로 옮겨졌고요. 운전을 배운 뒤 가장 큰 낙은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듯 핸들 위에 살포시 올리며 페달 대신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거랍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다고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제가 코너링도 참 좋아요. 핸들에 가볍게 얹은 손이 미끄러지듯 스치면서 코너링도 그렇게 부드럽더라고요. 아무튼 잘해요, 운전. 운전하는 것도 무척 좋아하고요. 피아니스트 대신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어요.


  그럼 피아노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93년에 태어난 우리의 삼익피아노는 식구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이사를 하셨던 엄마, 아빠를 졸졸 잘도 따라다녔는데 얘가 덩치가 제법 크잖아요. 방 한 칸 차지하며 20여 년을 살다가 결국에는 부모님께서 다니는 성당에 기증하셨대요. 사실 조금 전까지도 작별인사도 없이 헤어진 게 참 아쉬웠는데, 방금 이 글을 쓰면서야 피아노가 더 좋은 쓰임을 찾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이쯤에서 피아노에게 베스트 드라이버가 된 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볼까요?


  '삼익 피아노야, 너는 나의 첫사랑이야.

  묵직한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누르며 페달을 처음 밟았을 때 울리던 그 감동을 기억해.

  어른이 된 나는 오선 악보 대신 6차선 고속도로를 달리는 걸 좋아해. 그리고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브레이크와 엑셀을 헷갈리지 않게 잘 밟으면서 널 떠올려.

  넌 목소리가 크니까 자동차 회사에다 자율 주행 기능은 천천히 발전시켜도 된다고 좀 전해줄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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