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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18. 2024

초당옥수수를 먹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 초당옥수수 먹고 싶지?

  우리 집 식탁에 제철 식재료를 올리는 일은 현관문에 붙여있던 마트의 전단지가 시키는 게 아니라 유달리 제철 냄새를 잘 맡는 막내 덕분입니다. 막내는 어려서부터 남달랐어요. 세 살을 앞둔 겨울에는 하우스 딸기가 출하되기 시작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따기(딸기)'를 찾더니 인생의 먹거리들이 쌓일 때마다 그 계절을 기억해 두었다가 제철 행복을 알려줍니다. 지난가을에는 제철 사과가 너무 비싸서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막내는 ‘제철이라며’ 어쩜 그렇게 세상 귀여운 얼굴로 맛있게 말하는지 지갑을 열 수밖에 없더라고요.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막내가 초당 옥수수철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당근!'

  저 명랑한 소리, 당근!

  초당 옥수수가 제철이라는 막내가 전한 소식에 당근마켓 검색어 알림에 '초당 옥수수'를 등록해 두었지요. 예전에는 마트에서 초당옥수수를 한 개에 이천 원에서 이천 오백 원씩 주고 사서 반쪽씩 먹다가 몇 해 전부터는 수산리 주민에게 '파치'라는 고급 정보를 입수해 이것만 먹습니다. 가격이요? 궁금하시죠. 처음 파치를 사 먹을 때는 하나에 오백 원이었는데 올해는 700원에 샀어요. 크기는 생각보다 큰데 중품이라고 판매자가 말한다면 마트에서 파는 상품에서 옥수수알이 2/3 정도 찬 상태라고 상상하시면 충분합니다. 맛은 똑같아요. 아니 사실 더 맛있어요. 싸잖아요.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지난 월요일 아침에 '초당옥수수'를 키워드로 등록하자마자 새로운 판매글이 올라왔다고 당근은 싱싱하게 울려댑니다. 20개 내외에 들어가는 한 망을 주문했다가 실컷 먹자 싶어서 또 한 망을 추가로 주문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초당 옥수수의 아삭한 단맛이 필요해 보이는 Y가 떠올라 그녀에게 물어보고는 또 한 망을 추가하고, 때마침 다른 판매글을 보고 초당옥수수 시세를 묻는 K에게도 파치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그리하여 어깨춤을 추며 퇴근을 하고 여전히 신이 난 어깨를 감추지 않은 채 초당 옥수수를 사러 애월에 다녀왔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아 보이네요. 현장에서 계산을 마친 뒤 산타할아버지처럼 초당 옥수수 꾸러미를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축구화는 옥수수 크기를 재는 새로운 쓸모를 찾았다 @무지개인간


  이날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땄다는 초당 옥수수는 수확 후 이틀 정도가 지나면 당도가 더 올라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머리와 달리 마음은 견딜 수가 없나 봅니다. 아니 입이 견딜 수 없나 봅니다. 얼른 껍질을 벗겨 노랗고 반짝이는 탱글탱글한 알곡이 줄지어 있는 초당옥수수를 전자레인지에 넣었습니다.

  옥수수 세 개, 전자레인지 넣고 5분, 뒤집어서 다시 5분.

  10분이 이렇게도 길었나요? 아침에 '학교 가는 시간'이라며 울리는 알람은 10분도 10초처럼 지나가던데, 초당 옥수수를 찌며 껍질을 담은 일반 쓰레기봉투를 정리하고 싱크대까지 씻었는데, 아직도 옥수수는 익어가는 중입니다.


  삐이, 삐이, 삐-

  드디어 반가운 소리가 들립니다. 그럼 맛을 볼까요? 아직은 단맛보다는 옥수수밭의 싱싱함이 더 크지만 한 입씩 베어물 때마다 내일은 더 맛있을 거라는 희망도 입안에 가득 찹니다. 맛있어요. 아삭아삭하고 사각사각한 단맛이 '역시 초당옥수수야!'라고 말하게 되지요.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을 보니 마음과 입이 견딜 수 없었는 게 아니라 손이 견디지 못했던 것 같아요. 초당옥수수가 제철이라고 두 망이나 사서 든든하게 준비해 놓은 '나'를 칭찬하고 싶어 지네요. 게다가 그날 파치 시세로는 가장 저렴하게 샀더라고요. 이러면 정말 맛이 없을 수가 없어요.


제주 초당옥수수 @무지개인간


  우리 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옥수수 알 길게 두 줄 남겨 가지고 우리 아기 하모니카 불고 있어요.

  도레미파솔라시도 소리가 안 나 도미솔도 도솔미도 말로 하지요.


  아,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초당옥수수만 먹고 싶다.


  초당옥수수를 먹을 때는 아주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집니다. 물론 하모니카를 불 건 아니지만 옥수수를 먹다 보면 줄도 맞춰야 하고 좌우의 알곡의 균형도 맞춰야 하니 바쁩니다. 그래서 '초당옥수수를 먹으며 아주 현실감이 넘치는 글을 써야지'하고 노트북을 켰다가 알곡의 줄을 맞추느라 바빠서 다시 껐습니다. 그다음 날 저녁에는 책을 읽으며 초당옥수수를 먹어보겠다고 책을 펼쳤다가 이내 덮었습니다. 이번에도 알곡의 줄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을 동시에 두 가지씩이나 하겠다는 마음은 과욕이라 여기며 초당 옥수수를 먹는데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마법의 초당 옥수수 @무지개인간


  "엄마, 수학 문제 물어봐도 돼?"

  안돼, 네가 아무리 기말고사를 앞둔 사춘기 아들이라고 해도.

  "엄마, 나 고기 좀 구워줄 수 있어?"

  안돼, 네가 아무리 먹는 모습이 귀여운 성장기 아들이라고 해도.

  띠 리리리 리리 라라라 리리리 리-

  너도 안돼, 네가 손이 없어 빨래를 스스로 건조기에 넣지 못하는 세탁기라 해도.


  아무튼 초당옥수수를 먹는 동안에는 모든 게 다 멈춰버립니다. 이쯤에서 제목도 '초당옥수수를 먹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초당옥수수를 먹을 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로 바꿔야 할 것 같네요. 지난 일주일은 무수한 호출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틈이 날 때마다 옥수수를 열심히 먹었습니다. 뭐랄까, 초당옥수수 때문에 글을 쓰지도 책도 읽지 못했다는 안부도 살짝 얹어 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일은 우리 집에도 초당옥수수가 있었다가 없어지는 날입니다. 옥수수가 머문 자리에 다시 책과 글을 알알이 채워볼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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