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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l 03. 2024

미리 써놓은 묘비명

  어쩌다 보니 최근에는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피하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으며 둘둘 둘러 말하지도 않을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과 죽음에 대해 나눠야 한다면 어려웠을 텐데 한 번은 성당에서 만난 엄마들, 또 한 번은 삶과 죽음을 주제로 진행된 강연에 참석해 죽음에 대해 거리낌 없는 마음을 나눌 수 있었어요. 사실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더러 빨리 죽으란 소린가?' 혹은 '얘가 지금 힘들어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건가?'라는 물음표를 여러 개 만들어내는 부담감이 있지만, 연결 고리가 없는 타인과 나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나마 담백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만 덤덤하게 인정하고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먼저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당 교우들과의 '묘비명(墓碑命) 작성하기'를 한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저는 마음 깊이 각인될 죽음을 보았고, 스무 살이 되어서는 안타까운 죽음을 가까이에서 여러 번 보았기에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의가 내려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획에는 없던 묘비명을 적으려고 하니 머릿속에 먹구름이 가라앉더라고요. 그래서 요 며칠 째 아침마다 떠오르는 문장을 묘비명에 새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묘비명을 정했다 @무지개인간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선, 울컥하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를 뻔했지만 온 힘을 다해 막아냈다는 소식부터 전해 드립니다. 가끔은 상상만으로도 감정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튼튼한 댐을 잘 지었는지 홍수가 터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남들은 '독하다'라고 했을지 몰라도 울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아침마다 계속 생각이 났던 말은 '울지 마, 톤즈'로 알려진 故 이태석 신부님이 계셨던 살레지오 수도회의 창설자이신 성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 성인의 말씀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사랑하십시오."

  

  아이들을 대할 때는 (극대노의 감정에 잡혀 있지 않다면) 이 말을 자주 새깁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아이가 느끼는 마음을 기준으로 삼으며 아이가 가진 애정 유리병에 사랑이 채워지도록 마음을 전했지요. 그러나 더 이상 엄마인 제가 이 세상에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이제 보니 엄마만 너희에게 사랑을 준 게 아니었어. 나도 너희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너희를 통해 사랑을 알게 되었단다'라는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어요. 그러니 너희도 서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며 너희의 자녀에게 그런 사랑을 실천하라고 당부하고 싶었지요. 죽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잔소리입니다.


  여기에 가장 큰 착오가 있다면 '나는 만수무강할 것'이라는 착각이지요. 게다가 우리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뤘고 손자손녀를 품에 안겨 주었으며 모든 것이 평화로운 순간에 제게 주어진 삶을 마쳤다는 오류를 범했지요. 갑작스러운 죽음, 질병 등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왜곡이 발생했지요. 오호통재라. 묘비명을 적어보는 동안 몇몇은 훌쩍 혹은 펑펑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묘비명을 쓰고 미리 준비해 놓았던 장례식의 풍경까지 여유 있게 발표를 한 사람의 모습치고는 모순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만큼 아무리 준비를 해도 죽음이란 이렇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이겠죠.


  지난 주말에 다녀온 <그림책으로 배우는 삶과 죽음>의 저자 임경희 작가님의 강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아이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참 좋은 매개체인 그림책을 두고 죽음과 유한한 삶을 대화의 소재로 삼는 대신 협박용으로만 사용했더라고요.

  "엄마는 영원히 살지 않아. 우리는 언젠가 헤어져. 그러니 어쩌고 저쩌고."

  강의를 듣는데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던지요. 아, '어쩌고 저쩌고'에는 수많은 잔소리가 담기는 거 아시죠? 시간을 잘 써라, 후회 없는 시간을 살아라, 그러니 공부해라, 공부해야 할 때를 놓치지 마라, 현재의 소중함을 알아라, 제발 부탁이다, 제발 좀, 좀, 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무지개인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시작과 끝 사이에만 산단다.

  

  강의 중 소개해 주신 그림책 <살아 있는 모든 것은(lifetimes)>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참 멋진 문장이죠. 그림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삶의 바라보는 시각을 나누고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었는데 그동안 아이들과 나누기에는 다소 어려운 주제라고 미리 판단하여 아이들이 생각할 기회를 박탈한 것이 참 아쉬웠어요. 초등학교 교사로 30년이 넘게 초등학생들과 지낸 임경희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배운 귀한 문장도 나눠 주실 때는 더더욱 말이죠.

  '죽음은 삶을 빛나게 닦아주는 손수건이다.'

  그러게요. 매일 밤마다 (사)춘기와 (사)학년 어린이와 그림책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 졌어요. (부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제게 있길요.)


  최근 저에게 묘비명을 생각해 보고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정의해 볼 계기가 온 것은 산다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소중하고 빛나게 가꾸라는 의미로 흘러온 것이겠죠? 시작과 끝, 그 사이에 후회가 남지 않을 의미 있는 것들로 가득 채우겠다는 욕심을 7월의 첫날 그리고 하반기의 시작하는 날에 가져봅니다. 독자님들의 2024년 하반기도 여느 때처럼 빛나길 기도드려요.




   

     

+ 다정한 독자님, 글을 처음 쓸 때는 몰랐지만 발행하는 시점에 뒤늦게 서울 시청역 교차로 사고 소식을 들었어요.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9분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어떤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녁 미사 중 그분들을 위해 기도드릴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여전히 죽음이 두렵기만 하다면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어보세요.

+ "사람들한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줘."

   "화해하세요! 먼저 사과하세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세요! 너무 늦기 전에."라는 마음의 울림을 주는 소설 <비올레트, 묘지지기>(발레리 페랭 씀)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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