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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l 12. 2024

벌레를 키운다고요?

"벌레를 키운다고요?"
 - 네.
"집에서요?"
 - 네, 집에서요.


  제주에서 동네를 산책하는 일은 참 즐겁습니다. 그중 가장 즐거운 산책은 우연히 동네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이름 모를 풀과 꽃을 자세히 보고 있는데 옆에 낯선 운동화가 보입니다. 산책 중에 사람이 나타나면 새로운 세상도 열립니다. 저도 그 덕에 봄이면 지천에 널린 무성한 잡초가 '갓'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여름이면 토종 오디나무에 작지만 알찬 검붉은 오디가 달리는 것도 배웠거든요. 물론 산책길에도 '기브 앤 테이크(give&take)'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저도 우리 동네에서 고사리를 많이 꺾을 수 있는 곳과 손질하는 법을 알려주고, 동네에 딱 한 그루 있는 비파나무는 열매가 잘 익을 때쯤이면 동네 언니들을 데려가 비파 열매 서리를 하기도 하지요.


  "여기 뭐 있어요?"

  귤나무의 잎을 하나씩 앞뒤로 뒤집어가며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도 낯선 신발 한 켤레가 옆에 와서 멈췄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대화가 낯설지는 않습니다. 채집가들에게 이런 류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보는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이니까요.

 '좋은 거 있으면 같이 먹어요. 어떻게 먹는 거예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아가며 진짜 물음표를 건넬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저도 지난봄에 이렇게 말을 걸었더니 "해보젠?('해볼래?'라는 제주어)"이라는 반가운 대답과 함께 두릅이 뚝하고 손에 떨어진 적이 있었거든요. 아, 그런데 이를 어쩌죠. 저는 오늘 낯선 신발 씨에게 빈 손을 드려야 하네요. 보물을 찾듯 귤나무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저는, 지금 '반려애벌레'를 찾고 있거든요.


  "애벌레를 찾고 있어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낯선 신발 씨가 허허, 하며 웃습니다.

  "벌레를 찾는다고요?"

  "네, 제가 나비 애벌레를 키우거든요."

  "네? 벌레를 키운다고요?"

   '애'벌레에 악센트를 잘 넣었는데 목소리가 작았나요? 이번에도 낯선 신발 씨는 잘 못 들은 것 같습니다.

  "네, 애! 벌레를 키워요."

  "집에서요? 집에서 벌레를 키운다고요?"

  보면 볼수록 귀엽고 사랑스러운(愛) 벌레인데, 낯선 신발 씨는 오늘 그 사실을 인정할 생각이 없나 봅니다.


  비록 마음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낯선 신발 씨는 행운을 남기고 가던 길을 갔나 봅니다. 오늘도 '꽝'인가 보다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작고 귀엽고 소중한, 아주 코딱지 만한 생명체가 눈에 쏙 들어왔어요. 드디어 올해 첫 호랑나비 애벌레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오늘 만난 애벌레는 1, 2월의 폭설과 3, 4월의 폭우를 무사히 넘기고 세상에 나온 엄마, 아빠 호랑나비가 낳은 알과 알을 깨고 나온 애벌레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애벌레를 찾기가 어려웠거든요. 나비를 키우는 우리 집의 여름 풍경이 10년 차에서 멈추는 줄 알았는데 낯선 신발 씨가 두고 간 행운 덕분에 호랑나비 애벌레를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반려 애벌레 @무지개인간
알 껍질부터 아무 지게 먹는 반려 애벌레 @무지개인간

  

  아, 오늘도 새로운 세상을 들고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호랑나비 애벌레를 찾는 행운뿐만 아니라 10년째 이어진 반려애벌레와의 만남을 이어주었고, 애벌레를 키우며 배울 크고 작은 깨달음을 미래의 시간에 뿌려 놓고 다시 산책을 떠났습니다. 다시 우연히 '조금 덜' 낯선 신발 씨와 두 번째 만남을 가진다면 그때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애(愛) 벌레와 나비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방금 이 글을 뚝딱뚝딱 써놓았으니 브런치스토리의 글을 읽어보라고 해야겠습니다. 분명 벌레를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게 될 테니까요. 어쩌면 낯선 신발 씨도 해마다 여름이 되면 제철 행사로 호랑나비 애벌레를 키우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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